사화집에서 읽은 시

파란 대문집 외 산문 1편/ 김금용

검지 정숙자 2024. 1. 21. 02:30

 

    파란 대문집 산문 1편

 

    김금용

 

 

  서쪽이 빨갛게 익은 노을을 불러내도

  동쪽의 푸른 아침이 날 깨워줘서

  파란 대문집 여학생으로 불러주는 걸 좋아했다

 

  벽에 너울거리는 그림자까지

  담뱃불 안에 끌어 모아

  내게 따뜻한 빛을 건네주던

  아버지 닮은

  담배 피우는 남자를 사랑했다

 

  동향집은 춥고 그림자가 길었지만

  노을을 쫓는 어둠이 저녁연기에 그슬리면

  강 너머로 길 떠난 동생이 눈에 밟혀

  서쪽 창엔 커튼을 늘어뜨리고

  겨울을 나는 콩새에 귀를 기울였다

  단풍나무 그림자가 붉어지면

  씨앗을 따먹으러 일곱 살 동생처럼 파란

  대문 담장을 뛰어오르는 콩새

 

  쓸데없이 길어지는 우울증을 벗어나려고

  콩새처럼 동에서 서쪽으로

  다시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날개를 폈다

 

  동향집은 빛이 짧아서 꽃 피우기가 힘들지만

  동쪽은 푸른 빛이 많다고 믿어서

  노을이 내 방 커튼을 젖히며 밀려들어도

  나는 파란 대문집 여학생이었다

     -전문(p. 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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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PRIT/ 『불교문예』 2023년 봄호 권두 에세이 [인공지능과 선시]에서 일부 발췌함>

 

   시는 문약文弱의 대명사가 아니다

 

 

  지난주 한 단톡방에 AI를 활용한 시 쓰기에 대한 질의가 올라왔다. 이미 논문이나 신문에서는 이용되고 있는 것 같은데 과연 시 쓰기에도 실제 활용할 수 있는지, 누가 실험해 본 적은 있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원에 다니는 한 후배 시인이 챗GPT에 가입한 후, '팔월'이란 제목을 주고 시 쓰기를 시켜보았다고 말한 게 기억이 난다. 구체적으로는 화가 고흐의 사물에 대한 시선과 남프랑스의 배경을 넣어 '팔월'이란 시를 써달라고 주문했더니, 꽤 멋진 시가 나왔다는 것이다. 읽어보니 멜랑콜리한 분위기 연출이며 언어 구사력이 제법 그럴싸했다. 그러나 첫인상과 달리 주제도 창의성도 없고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자기 색깔이 없었다. 짜깁기 냄새가 나서였을까, 매끄럽기는 하나 감동이 없었다.

  작년 8월에 대학로 예술극장에서 인공지능 '시아'가 썼다는 시집 『시를 쓰는 이유』로 5명의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시를 낭독하고 율동 퍼포먼스를 펼쳤다. AI 기술을 활용한 시편들이 궁금하던 관중은 침을 삼키며 지켜봤지만, 아쉽게도 실험적이고 상업적 시도로 헤아려질 뿐, 어떤 감동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개발자가 만들어 낸 관념적 시상의 기계적 조합으로 감성의 '인공정신'까지는 가져올 순 없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인공지능 '시아'의 시도로, 책이 필요 없어지고 폰에 깔린 앱을 열어 필요한 때 탐구와 사색과 명상을 이루는 시대가 온 것을 인지하게 되었지만, 인공지능이 시인의 정신까지, 섬세한 감성까지 가질 순 없다. 문학은, 특히 시는 여전히 매번 백지를 앞에 두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시인의 고뇌에서, 시인의 정신세계에서, 인공지능의 연산과 속도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시인의 직관에서 매번 새롭게 창조되니 말이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은 21세기 화두이자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과학의 발달로 사회가 지성 중심, 실용 중심으로 치닫고, 기초학문인 '철학'이 대학에서 사라지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상상력과 감성은 상업자본주의와도 잘 반죽되어 새로운 창조의 물결을 만드는 것이라고나 할까?

  실제로 아이폰을 만들어 낸 스티븐 잡스가 18세기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편들을 통해 영감을 얻어 아이폰 사각 부분을 둥글게 디자인했고, 세계적 음향기기 하먼 인더스트리의 시드니 하먼셰익스피어의 광팬으로 "시는 은유와 상징을 매개로 복잡한 음향 시스템의 환경을 이해하기 쉽게 바꾸고, 해결책까지 제시한다."라며 시인의 경영마인드로 전 세계 사운드 시스템 업계의 대부가 되었다.

 

  "시는 힘이 세다"라고 나도 작년에 한 문예지에 발표한 적이 있지만, 김혜순 시인과 인터뷰를 한 미국 시인 포레스트 갠더는 시집 『죽음의 자서전』(2016)을 통해, '시어에는 투명함과 밀도, 출현과 사라짐의 연출 사이에서 이뤄지는 에로틱한 긴장'이 있다며, '시어의 중요성'과 함께 "이모티콘으로 대화하는 시대엔 시가 더 중요해진다."고 설파한 바 있다. 스스로의 각성과 주관, 시각을 갖고 자기 색깔이 분명한 시를 쓰는 것은, 인공지능 로봇이 일부 흉내를 낼 수 있다 하더라도, 진정한 창조로 힘과 감동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자고영웅진해시自古英雄盡解詩

  자고로 영웅은 모두 시를 잘 알고, 잘 지었다. 

 

  당나라 임관林寬이 시에서 밝혔듯이, 시는 문약文弱의 대명사가 아니다. 오히려 직관의 강력함, 힘이 그 본령이다. 그래서인가 중국에서는 지금도 초교 1학년 교재에서부터 당시唐詩를 배우고 암송한다. 사회가 어떻건 정치적 상황이 어떻건, 삶의 바탕에는, 문화의 기층에는, 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시의 힘은 강력하다.

  시를 통해 시인들은 늘 새롭게 거듭날 것이다. 그래서 늘 창조하는 이들의 분발로 절차탁마가 이뤄지는 게 맞다. 시작 생활로 평생을 살아온 시인들이 이를 잊을 일이 없으니 말이다. (p. 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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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여시 3집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에서/ 2023. 11. 11. <채문사> 펴냄

  * 김금용/ 서울 출생,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물의 시간이 온다 각을 끌어안다』외 3권, 번역시집『문혁이 낳은 중국현대시』외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