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라는 이름을 벗고
이경
오랜 침묵을 깨고 나리꽃 피었다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 이름의 바깥에 적나라하다
공들여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잎으로 꽃봉오리를 받들면서
천천히 꽃 머리를 수그리면서
사라질 것이 분명한 색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꽃은 많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한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만 타오르는 중이다
차가운 불
손가락으로 말이 닿을 수 없는 곳을 가리키는 중이다
나리꽃! 부르기 전에 이미 대답하는 너
벙어리처럼 따라 웃는다
세상에는 한마디도 너에게 맞는 말이 없어
벗은 꽃에게 옷 입힐 수 없다
-전문(p.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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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여시 3집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에서/ 2023. 11. 11. <채문사> 펴냄
* 이경/ 경남 산청 출생, 1993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푸른 독』『야생』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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