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 이경

검지 정숙자 2024. 1. 18. 02:07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

 

     이경

 

 

  오랜 침묵을 깨고 나리꽃 피었다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 이름의 바깥에 적나라하다

 

  공들여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잎으로 꽃봉오리를 받들면서

  천천히 꽃 머리를 수그리면서

  사라질 것이 분명한 색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꽃은 많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한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만 타오르는 중이다

  차가운 불

  손가락으로 말이 닿을 수 없는 곳을 가리키는 중이다

 

  나리꽃! 부르기 전에 이미 대답하는 너

 

  벙어리처럼 따라 웃는다

  세상에는 한마디도 너에게 맞는 말이 없어

 

  벗은 꽃에게 옷 입힐 수 없다

     -전문(p.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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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여시 3집 『꽃이라는 이름을 벗고』에서/ 2023. 11. 11. <채문사> 펴냄

  * 이경/ 경남 산청 출생,  1993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푸른 독』『야생』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