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메모, 2017년 4월 2일
허수경(1964-2018, 54세)
봄이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있다. 올봄이 그랬다. 겨울 동안 그런대로 열심히 잘하고 살았던 것 같은데 무슨 잘못을 하고 벌을 받는 양 봄은 좀체 올 기척이 없었다. 식구 가운데 하나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였다. 겨울을 그런대로 잘 넘기겠구나 싶었는데 그는 결국 이월 중순에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다. 원래 심장질환 외에도 여러 병이 있어서 아슬아슬하기는 했다. 그리고 겨울 끝자락에 결국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겼다. 신종 독감 바이러스가 그의 몸에 서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원한 지 이틀 만에 그는 격리병동으로 옮겨졌다. 그를 방문하려면 감염을 피하기 위해서 마스크와 장갑, 수술하는 의사들이나 입을 법한 일회용 가운을 입어야만 했다. 병동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갑갑한 마스크를 쓰고 몇 달 동안 바라보다가 창밖을 보니 겨울은 물러나지 않을 것처럼 헐벗은 나무들 사이에서 진을 치고 눈을 녹이지 않았다.
매일매일 병문안을 하는 막바지의 겨울길은 몹시도 추웠다. 바람까지 부는 날이면 잔뜩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 했다.병원에는 아픈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고 그들을 방문하는 이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성거렸다. 문병이 오래 걸리는 날이면 병원 구내매점에 가서 커피와 간단한 샌드위치를 사서 매점 안에 마련된 작은 라운지에서 먹곤 했다. 공간이 좁아서 더러 낯선 이들과 합석을 하곤 했는데 다들 굳은 표정으로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는 종종골음을 치며 사라지곤 했다. 그들도 돌봐야 할 가까운 이들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책을 읽고 있는 할머니와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내가 커피를 급하게 마시며 샌드위치를 채 다 씹지도 않고 넘기는 걸 할머니가 보았던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물 한 병을 건네주었다. 그러곤 말했다. 자신은 아들 때문에 벌써 육 개월 동안 이곳을 드나든다고. 난치병으로 아들은 하루하루 병마와 싸우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내게 말했다. 이렇게 급하게 먹고 병자에게 돌아가려는 걸 보니 당신에게는 희망이 있는 거라고. 자신은 더이상 급하게 병자에게 돌아가려고 하는 걸 포기했다고. 물을 마시고 천천히 희망을 곱씹으며 가라고 했다. 그때가 좋은 거라고. 나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나오다가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혼자 남겨져 읽고 있던 책을 다시 펼치고 있었다. 아주 두꺼운 책이었다. 겨울 동안 읽었을 책을 그녀는 얼마나 오래 이 라운지에서 읽어야 할지.
그러나 희망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멀어지고있었다. 어느 날, 그는 열이 사십 도가 웃돌고 온몸이 마비되는가 하더니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의사와 간호사가 동분서주하며 해열을 하고 마비된 몸을 푸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는 동안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하고 누워 있는 그를 보며 이렇게 그를 놓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렇게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손을 쥐고 다시 돌아오라 돌아오라고 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비를 동반한 바람이 불었다. 나무는 새순을 낼 생각이 없었고 꽃은 꽃을 피울 꿈도 꾸지 않았다. 희망이라니.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입원하고 있는 동안 어떤 날은 곧 일어나겠구나 했고 어떤 날은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나는 길가의 벚나무 밑에 한참 서 있었다. 이 나무에 꽃이 피는 날, 우리는 같이 꽃을 볼 수 있을까? 봄이 오는 걸 그저 계절의 변화라고 생각하며 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몇 주가 지나고 난 뒤 그는 거짓말처럼 퇴원을 했다. 의사는 퇴원을 할 수는 있지만 계속 지켜보아야 하며 독감 바이러스가 약하게 만든 심장에 이상이 생기면 그길로 다시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를 집으로 데려오고 난 뒤 나는 죽을 끓일 노계 한 마리를 샀고 마늘을 넣은 닭죽을 끓였다. 그는 닭죽을 쉬엄쉬엄 넘겼다. 그리고 가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봄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제법 따뜻한 느낌이 도는 햇살이 번지는 것을 보고는 희미히게 웃었다. 나는 그를 침대에 누이고 마당으로 나와 겨울이 어질러놓은 것들을 치웠다. 이제 봄이 올 것이다. 봄이 올 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나 기어이 봄은 와서 나무에는 꽃이 피고 잎은 점점 돋아나며 그 나뭇가지 사이로 새들은 깃들어 올해를 보낼 둥지를 지을 것이다. 그렇게 치러야 할 일을 다 치러야만 봄이 올 것 같은 삶의 느낌은 어려우나 나쁘지는 않았다. (p. 284-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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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수경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시 글들』에서/ 초판 1쇄 발행 2019. 10. 3./ 초판 6쇄 발행 2021. 8. 8. <난다> 펴냄
* 허수경/ 1964년 경남 진주 출생,1992년 독일行,서울에 살 때 두 권의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 집』 발표, 독일에 살면서 세 번째 시집『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 박사 학위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옴, 시집『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나는 발굴지에 있었다』『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모래도시』『아틀란티스야, 잘 가』『박하』, 동화책『가로미와 늘메 이야기』『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슬픈 란돌린』『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그림형제 동화집』등을 펴냄.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 수상. 2018. 10. 3.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 유고집『가기 전에 쓰는 글들』『오늘의 착각』『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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