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메모, 2011년 12월 21일
허수경(1964-2018, 54세)
역이라는 것은 스쳐지나는 곳이 아니다. 역이라는 곳은 스쳐지나온 모든 것을 버리는 곳이다. 저녁이었다. 저 미지의 역에 도착해서 철로를 바라보는 마음은 언젠가 돌아갈 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었다. 이 세계에 희망이 없다면 나는 이 세계에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로 갈 수 없을 거라는, 혹은 당신이 날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모든 낯선 말 앞에서 문장의 슬픔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 일인가. 나는 아직도 사랑할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과 함께 나서야 할 길이 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아프다. 내 잘못이다. 그립다, 당신 말로 하지 못할 슬픔의 강이 가슴속을 지나간다. 그 강에 비친 노을 속에 당신의 얼굴이 지나간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라고 내 가슴을 달래는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 도저한 무력감. 이 도저한 불안. 이 도저한 말 못할 일들. 너도 그렇겠지 너도. 너도 그러니? 기대와 어긋나니 외로운 거다, 라는 말은 참 옳구나. 네가 나의 기대에 맞게 해주지 않아서 나는 외로웠던 거다. 더 이상 들키지 않아야겠다. 멀리서 지켜보며 잊어버려야 할 일들을 잊어야겠다. 그리고 나의 시.
어둠 속에 쪼그리고 앉아 너, 시를 생각했다. 난 너 같은 인간이 좋다. 저도 추우면서 다 퍼주는 너. 저의 가난을 참으면서 언제나 부자인 척 나를 편하게 하는 너. 네가 옆에 있음 모든 것이 다 내 편이 될 것 같은 너. 나를 닮아 가진 거 세상에 다 놓은, 구석의 너, 너는 민정. (p. 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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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수경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시 글들』에서/ 초판 1쇄 발행 2019. 10. 3./ 초판 6쇄 발행 2021. 8. 8. <난다> 펴냄
* 허수경/ 1964년 경남 진주 출생,1992년 독일行,서울에 살 때 두 권의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 집』 발표, 독일에 살면서 세 번째 시집『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 박사 학위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옴, 시집『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나는 발굴지에 있었다』『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모래도시』『아틀란티스야, 잘 가』『박하』, 동화책『가로미와 늘메 이야기』『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슬픈 란돌린』『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그림형제 동화집』등을 펴냄.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 수상. 2018. 10. 3.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 유고집『가기 전에 쓰는 글들』『오늘의 착각』『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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