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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메모, 2014년 3월 30일/ 허수경

검지 정숙자 2023. 5. 15. 01:57

 

    시작 메모, 2014년 3월 30일

 

     허수경(1964-2018, 54세)

 

 

   오늘부터 시작된 여름 시간. 한 시간이 갑자기 사라진 날. 이것은 무슨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다만 정치적인 결정일 뿐.

 

   아침에 일어나 어제 바깥으로 내놓은 화분들을 보았다. 겨울이 없었으니 이 아이들도 올봄 못다 잔 잠을 계속 잘 것이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은 무엇을 해도 좋을 듯하다.

 

   다들 마당에 나와서 마당 청소를 하거나 새 꽃을 심는다. 나는 이제 세 살이 된 가죽나무에 새순이 나오고 일본에서 온 수국 세 그루가 지난겨울 동안 한 녀석도 죽지 않고 새순을 내는 것을 보았다. 다행이다, 그 어린것들이 다 살아남아서. 내가 사라지고 난 뒤 이 정원을 가꿀 사람은 이 정원에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까. 하긴 그 모두 내 영혼의 일이었으니 다른 영혼은 다른 아이들을 사랑하겠지. 그리 집착하고 은애하면서 정원을 돌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 정원이 나의 가장 중요한 삶의 터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문장은 써놓고 얼른 지운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을 믿는 건 아닐까. 그렇겠지, 나는 언제나 비겁하니까.

 

   제프리 러시(영화배우) 악몽 두 가지: 무대 위에서 대사를 잊어버리거나 연습을 하지 않아서 무대를 망쳐버리는 것. 어떤 닫힌 장소에서 호랑이와 함께 있는 것. 호랑이는 주위를 맴돌지만 습격하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는 실패할 것이라는 악몽에 시달린다. 악몽에 시달리든 시달리지 않든 우리는 실패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패하는, 실패하는 존재다. 죽음은 모든 실패의 어머니이다. 몸의 실패.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패의 근원이다.

 

   어제 나는 어떤 젊은 어머니를 보았다.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달렸는데 그녀의 자전거 뒤에는 아이를 싣는 작은 차가 있었다. 또 그녀는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개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커다란 검은 점이 박힌 개 한 마리가 자전거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또 그녀의 자전거 앞에는 그녀의 아들로  보이는 다섯 살가량 되어 보이는 아이가 헬멧을 쓰고 자전거로 달리고 있었다. 달리면서 그녀는 앞서 달리는 아들에게 천천히 달리라는 잔소리를 하다가 옆에서 가는 개를 보다가 또 뒤를 돌아보며 작은 차가 안전한지 아닌지 확인했다. 혼자 달리는 사람은 없다. 특히 어머니는 혼자 달릴 수 없다.

 

   일요일이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뮌스터에 대한 글쓰기. 그곳에서 보낸 나날에 대한 글쓰기.

 

   아이들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공놀이를 한다. 이 마을에 잠시 머물렀던······ 앗, 문장을 놓쳤다. 내가 당신에게 관심이 있을 때 관심이란 말은 아마도 나는 당신 언저리에서 서성인다는 의미에 가까울 거다. 봄꽃이 당신의 중심에서 어떤 다른 중심의 당신에게로 화살을 쏜 적이 있었나?

 

   봄 수술

당신은 오늘, 수술받는 나에게 봄 햇살이다.

당신도 온몸이 저릴 만큼 아프구나.

내 몸은 열이 찬 이마의 별을 달래기 위해

차갑거나 더운 수건을 기다렸다.

그때

당신의 손가락은 내 입술이 아니라

내 관자놀이를 더듬었네.

어지러움의 눈동자는 나를 향하여

당신의 갓 태어난 포옹을 열었네.

 

그게 좋아서

우리의 골목은 어둡고 오목했다.

그리고 우리를 번식하기에 참 좋은 날씨

이 작은 오전도 오후도 아닌 시간

아주 안녕했네.

나를 안은 당신의 팔이 저릴 만큼.

  - (p. 22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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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수경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에서/ 초판 1쇄 발행 2019. 10. 3./ 초판 6쇄 발행 2021. 8. 8. <난다> 펴냄   

  * 허수경/ 1964년 경남 진주 출생,1992년 독일行,서울에 살 때 두 권의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 집』 발표, 독일에 살면서 세 번째 시집『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 박사 학위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옴, 시집『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나는 발굴지에 있었다』『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모래도시』『아틀란티스야, 잘 가』『박하』, 동화책『가로미와 늘메 이야기』『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슬픈 란돌린』『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그림형제 동화집』등을 펴냄.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 수상. 2018. 10. 3.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 유고집『가기 전에 쓰는 글들』『오늘의 착각』『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