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메모, 2018년 4월 15일
허수경(1964-2018, 54세)
이 시들은 귤 한 알에서 시작되었다. 암이 재발하고 난 뒤 병원에서 더이상 수술조차 받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일주일이 지난 뒤쯤이었다. 오랜 입원도 그랬지만 위암으로 도려낸 위와 커진 종양 때문에 더이상 음식을 마실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인공적인 영양 공급만을 받을 수 있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의사들은 몇 주 몇 달을 버티지 못할 거라고 진단했으나 나 역시 더이상 살아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니 삼월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베란다 창틀에 작은 귤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병원으로 가기 전 무슨 생각인지 귤 한 개를 베란다 창틀 위에 올려둔 모양이었다. 언 귤을 먹으리라는 마음이었을까? 나는 창문을 열고 귤을 손으로 집어들었다. 귤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귤 향이 은은하게 나고 있었다. 얼지도 않았는지 귤은 상하지 않고 여전히 싱싱했다.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민정이 보내준 난다 노트 한 권을 꺼내들고
나는 쓰기 시작했다.
몇 편의 시가 나에게 남아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가기 전에 쓸 시가 있다면 쓸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내일 가더라도.
그리고 가야겠다. 나에게 그 많은 것을 준 세계로.
그리고, 그리고, 당신들에게로.
- (p. 306-308)
* 블로그註: 위 <시작 메모>는 2011년 4월 13일~2018년 4월 5일까지의 메모 중 마지막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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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수경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시 글들』에서/ 초판 1쇄 발행 2019. 10. 3./ 초판 6쇄 발행 2021. 8. 8. <난다> 펴냄
* 허수경/ 1964년 경남 진주 출생,1992년 독일行,서울에 살 때 두 권의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 집』 발표, 독일에 살면서 세 번째 시집『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 박사 학위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옴, 시집『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나는 발굴지에 있었다』『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모래도시』『아틀란티스야, 잘 가』『박하』, 동화책『가로미와 늘메 이야기』『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슬픈 란돌린』『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그림형제 동화집』등을 펴냄.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 수상. 2018. 10. 3.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 유고집『가기 전에 쓰는 글들』『오늘의 착각』『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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