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지형과 의제의 다양한 분기分岐
유성호/ 문학평론가
1. 문학사의 낯익은 재등장 흐름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대화라고 정의한 이는 카(E. H. Carr)다. 이러한 비유적 명명에는 현재의 어떤 흐름이나 국면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데 지난 시간의 그것들이 유력한 참조항이 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 역사에서 파천황의 신국면이 전개되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그것은 과거에 출현한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나선형이건 직선형이건 순환형이건, 일정하게 변형을 치른 채 다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면 기시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러한 재등장의 느낌은 그만큼 역사가 이미 있었던 것들이 일정하게 '반복 속의 차이'를 통해 생성되고 재현되는 현장임을 알려 준다. 때만 되면 인용되는 마르크스의 "역사는 되풀이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정언 역시 역사는 새로움 속에 오램이 있고 오램 안에 이미 새로움이 잉태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할 것이다.
잘 알다시피, 새로운 세기 들어 이른바 '미래파'라는 도발적인 명명으로 인해 '젊은 시인들'이 담론적 게토에 갇혔던 적이 있다. 새로운 천년이라는 물리적 조건이 이러한 신종 담론의 파생성을 극대화한 것은 물론이다. 적지 않은 시인과 비평가들이 '미래파'라는 수사가 제언되고 확장된 비평적 문맥을 살피지 않고 그저 전복적이고 해체적이며 서정시의 문법을 와해하는 일군의 세력 정도로 그들을 오인하거나 애써 그들을 무시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만큼 젊은 시인들 내부에 만만찮게 존재하는 차이의 양상은 유형학 마련의 성급함 때문에 전적으로 간과되었고, 그들은 난해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동류항으로 치부되는 결과를 빚게 된 것이다. 이만저만한 비평적 무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물론 이들의 새로움 역시 우리 시사에서 충분하게 실험되었던 어떤 속성들이 다양한 변형을 입고 분출된 양상이었을 것이다. 이제 문학사의 한장면이 되어 버린 이 새로움의 필드에서 많은 미래파들은 서정성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과거파가 되기도 했고, 과거의 기억 속으로 속절없이 사라지기도 했고, 여전히 언어적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현실의 비극성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문학사는 그들 내부의 동질성보다는 각각 시인들의 차이가 발생하는 스펙트럼의 호혜적 난장亂場을 더 기념하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이 시인들을 주목하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분할을 넘어, 포스트모더니즘의 한시적 물결도 지나, 자신만의 목소리들로 새로운 모색을 해온 흐름에 대해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해 가야 하는 책무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오래된 새로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그들의 집단적 등장과 분기分岐 역시 문학사의 낯익은 재등장 흐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p. 151-153)
2. 매서운 언어의 결을 통한 새로운 물질성
지난 연대 내내 우리 지식 사회를 달구었던 탈脫 근대 담론들은 우리 시의 엄숙주의와 계몽 지향성에 일정한 반성적 계기를 부여하였고, 기존 언어 권력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 커다란 인식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담론들은 우리 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이자 자질이었던 삶의 비극성에 대한 천착과 공동체 차원의 사회적 전망을 하나하나 지워 가는 폐단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시를 통한 인문적 통찰이 가장 낡은 방식으로 내몰리기까지 하였다. 1990년대 이후 꾸준히 심화된 이러한 미학적 근시성은 이제 우리에게 시의 대안적 가능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요청하고 있는데, 이는 후기자본주의의 흐름에서 시가 어떻게 개별화된 감각과 대중문화적 감염을 뛰어넘어 새로운 공동체적 언어에 다다를 수 있는지에 대한 대망과 깊이 연관되는 의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문학사 고비마다 등장하여 새로운 미학적 전위로 자리매김되곤 하는 '젊은 시인'이란 어떤 함의의 범주일까? 그것은 아마도 당대의 평균적 미의식을 뛰어넘는 창조적인 감수성을 제기하면서 등장한 일군의 세대론적 명명으로 대체한 어떤 것이다. 이들의 언어는 기존 문법에 대한 비판적이고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실물적 사례를 구축한 범례들을 일컫는 것일 터이다. 물론 이들의 언어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의 일부로 흡수되어 갔다. 모든 전위가 다 살아남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언어 가운데 가장 창조적인 것들은 일정한 시적 후예를 얻어 문학사적 자장으로 편입되기도 했을 것이다.
새로운 세기에 나타난 이른바 '젊은 시인들'의 시편은 수미일관하게 새로운 전복적 언어와 문법과 형태를 지닌 것들이었다. 이상李箱 이래 꾸준히 등장한 실험성 흐름의 낯섦이 이들에 의해 마련되었지만, 그것들 역시 이미 문학사에서 실험되고 남은 유산들이 변주와 반복을 결속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또한 이들의 시편은 시간이 지나면서 삶의 어둑한 비극성을 육체화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희망의 원리를 찾으려는 의지와 새로운 주체를 욕망하는 갱신 욕구 같은 것을 통해 고전적 속성으로 진입해 가기도 하였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이미 거시적 전환을 요청받기에는 일정하게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증거도 되겠지만, 시인들의 의식이 미학적 전위에서 정치적 전위로 나아가기에는 그 내적 절박성과 필연성에서 약체를 면치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 가운데 일부는 사회 변혁에 대한 회의, 자연으로의 침잠, 사사로운 기억이나 감각적 내면으로의 퇴행을 서둘러 담론화한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그만큼 그들은 타자와 소통하는 사회적 울림보다는 소통 거부의 유폐감과 난해성의 회로를 외장外裝으로 하여 미적 고립을 선택한다는가 미시적인 관찰과 표현을 중점적으로 보여 주는 감각 편향에 탐닉하는 쪽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역량 있는 전위들에 의해 이러한 의구심과 비판은 부분적으로 혹은 가능성의 차원에서 하나하나 극복되어 가기도 하였다. 가령 그들은 반反 은유의 환유 원리를 통해 그동안 시의 중심 원리로 기능했던 은유 중심의 작법에 대해 방법적 반성을 제기하면서, 자유로운 연상 형식을 통한 언어의 새로운 장場을 치열하게 보여 주었다. 이러한 개진 양상은 답답한 순한 회로에 갇혀 있던 한국 서정시의 활로를 뚫어 주는 미증유의 활력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오랫동안 시의 원리로 추앙받아 왔던 동일성 논리에 창조적 균열을 내면서 시로 하여금 무한한 원심적 확장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 안에는 고민 없는 화해의 세계보다는 치열한 길항과 갈등의 세계가 담겼고, 새로운 매체 결합 양상들이 시학적 표지標識로 빈번하게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들은 방법론의 확장에 크게 기여했으면서도 시에서 이루어지는 주체 정립의 의지나 타자에 대한 성찰에 대한 폭넓은 환대(hospitality)의 세계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자폐와 순환의 고민들이 난해를 동반한 것으로 오해된 것이 그 대표적인 비평적 국면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초에 등장한 젊은 시인들의 시에는 주체의 자기표현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은유적 욕망을 경계하면서 사물과 내면을 결합하려는 이중 소묘 기법이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미학적 층위의 성숙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시간의 흐름과 소명을 형상적으로 암시해 주는 이러한 풍경이 오로지 시적으로만 재구성되는 인위적 공간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여지없는 실체들이며 동시에 상상적 유추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은 예술을 실재와 대립하는 '비실재의 창조'로만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러한 균형적 태도가 바로 '예술'과 '환영(illusion)'을 겹치게 하면서도 갈라 주는 힘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결국 시라는 것에 대한 오랜 언어적 관행은 "객관적인 실재나 이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마음속에서 일으키는 반향과 그것에 의해 일어나는 정조, 그리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의 자각적인 감정"(헤겔)에 의해 구성되는 어떤 것이다. 근대가 지워 버린, 기억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시적인 것'을 우리가 탈환하고 재구성하고 표현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시적인 것'의 실체성을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새로운 주체의 발견과 정립을 욕망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볼 때, 물론 '주체'라는 말조차 그 자체로 세계 전유의 폭력성을 내장한 개념이지만, 탈脫 주체를 욕망하는 최종 규율의 언어 역시 주체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시적인 것'을 구성해 가는 이들의 균형감각을 여러 차원에서 소망하는 것이다.
이들의 언어는 새로운 주체를 욕망하고 그것에 한시성과 연속성의 길항을 부여하였다. 비록 '젊은'이라는 수사의 의미망(시인들의 실제 연배가 아니라 시단에 나와 자기 목소리를 발화한 연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이 세대론적 발상에 그쳤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들의 시가 자기 복제의 유혹을 넘어, 한시적인 세대론의 전략을 넘어, 퀴어류의 주변부적 상상력을 넘어, 무국적의 상상력과 유목적 주체가 가지는 일회성을 넘어, 새로운 내면의 리얼리티를 확장하고 매서운 언어의 결을 통한 새로운 물질성을 보여 준 점을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한때 '미래파'라고 불린 이들의 문학사적 성취이자 가능성이었던 셈이다. 이제 시단의 중견으로 이월한 그들의 이러한 경험과 반성 그리고 새로운 사유를 통해, 우리는 앞으로도 더욱 성숙한 형상으로서의 인간 존재 형식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이어 가게 될 것이다. 이제 '미래'는 미학적 현재가 되었고, '파派는 개개인의 목소리가 되었다. (p. 153-157)
3. 새로운 세기의 '시와 정치' 논의와 문학사적 실례
21세기 들어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혹은 서정)'의 본질적 · 수행적 기능에 대한 논의는, 시의 존재 방식과 역할에 대한 메타적 담론의 진경들을 연출해 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시에 대한 각양의 해석적 견해들이 그야말로 백가쟁명으로 전개되었다. 그 논의 결과 시의 근대적 규정들 곧 독백적이고 자기효현적이고 정서적이고 함축적인 양식이라는 생각이 지워지면서, 시가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결속하며 전개된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사르트르, 바디우, 랑시에르를 집중적으로 호출하면서 이루어진 이러한 시와 '정치(성)' 논의 과정에서, 우리는 자율성을 근대성의 핵심으로 보고 예술에서 정치성을 소거하려 했던 힘과 가파르게 맞선 역사를 시가 가지고 있다는 점에 상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비중으로 원용된 이가 랑시에르인데, 그에 의하면 정치와 동일한 어원을 가진 '치안(police)은 감각적인 것을 구획하여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분배하는 위로부터의 힘을 말한다. 반면 예술은 감각을 분배하는 치안과 감각을 해체하고 재분배하는 정치가 마주치는 현장이다. 그 점에서 모든 예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그런데 문학이 정치적인 것은 그것이 세계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단어들과 정체성 사이의 틈을 만듦으로써 그 안에 해방 가능성을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의 지배담론 안에서 특정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정치가 아니라 그 체계를 파열시켜 새로운 감성적 분배를 이루어 내는 정치를 뜻한다. 랑시에르가 던진 이러한 정치성 화두들은 공통 세계를 재편성하는 여러 지표들을 포괄적으로 함의한다. 물론 이러한 논의의 후경에는 당대 사회의 지형 변화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어떤 정점에 올라섰던 시와 정치성 논의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점이 있었다.
하나는 이 논의가 흔히 말하는 리얼리즘이나 현실 참여를 미학적 본령으로 삼아 왔던 이들의 자기 갱신 의지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세대론적 경험이나 미학적 견지에서 볼 때, 아직 정치적 요소들을 적극 실현하거나 본령으로 삼아 온 적이 없는 시인과 비평가들에 의해 논의가 진행된 것이다. 그 점에서 이 논의는 경험적 자기반성의 요소보다는 세대론적 자기 개진의 요소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일련의 논의들이, 구체적 시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제 비평이 아니라, 다분히 담론 비평 형식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게다가 논자들마다 혹은 개별 아티클마다 전혀 다른 정치성 개념을 상정하고 논의를 이끌어 간 사례도 적이 않았던 터라, 외연적 활황에 비해 작품적 논쟁은 매우 빈곤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90년대 '시와 리얼리즘' 논의가 구체적 실물들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이었다는 점과는 현저하게 구별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세대론적 욕망이 개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정치 혹은 그 구성 범주인 노동, 젠더, 국가, 윤리 등을 해석하고 재구성해 가는 안목과 실천의 다양성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우리 현실 속에는 수많은 정치성의 양태들이 존재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개재하는 권력 위계를 조정하는 정치 범주로부터,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 현실 정치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진다. 인간의 삶에 지속적이고 전면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러한 정치 양상들은, 우리 시가 깊이 관심을 기울여 온 문제이다. 말할 것도 없이, 시는 우리의 삶 속에 편만해 있는 현실 권력에 우회적으로 저항하고, 그 환부를 드러내고 치유의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부당한 정치가 초래한 상처들을 폭로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수자들을 옹호하고 긍극적으로는 타자성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돕는 상태의 회복을 꿈꾸어 왔기 때문이다. 시의 정치성은 이러한 과정으로 발원하고 현상하고 귀결된다. 그런가 하면 가정이나 학교에서 행사되는 다양한 미시정치 또한 만만치 않은 실재일 것이다. 근대 이후 각성된 개인들이 자기 권리를 확보하고 권력의 간섭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일반화되면서 삶 가운데 행해지는 미시정치 문제는 시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인정되던 가부장적 권력, 관습적으로 굳어 있던 남성중심주의, 장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가해지는 유형 무형의 폭력 등 많은 영역에서 이러한 미시정치의 문제가 대두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한 사회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과 충돌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가 시의 장場으로 끊임없이 들어와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초 내내 펼쳐진 시와 정치 논의는 현실 정치적 맥락을 환기하는 '정치적인 것'이 얼마나 낡은 것인가 하는 쪽으로 수행적 효과를 발휘하였다. 말하자면 시의 외연에 정치적 기표가 등장하거나 현실 정치 속에서 어떤 특정 경험을 담은 시편 대신에,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맥락을 산포한 시편들이 더 세련된 미학적 산물인 것처럼 오도될 가능성을 드러냈다. 그래서 시와 정치 논의는, 정치시의 전위들이 치러 내는 자기 갱신의 장면들 혹은 우리 시대의 맥락과 양상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사례들도 적극 점검해야 하는 과제를 남긴 셈이다. 당시의 젊은 시인들이 각개 약진으로 정치성의 두터운 진경에 다다른 것을 귀납하여 새로운 세기의 '시와 정치' 논의는 문학사적 실례들을 얻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우리가 마주한 새로운 비평적 의제임에 틀림없다. (p. 157-161)
4. 공동체적 차원의 사유와 실천으로
달라진 지형 변화에 따라 대안 담론의 흐름을 만들어 낸 우리 시단은 이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사실 문학사에서는 새로움의 철저한 자기 수정과 보완의 의지가 매우 편재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물론 그러한 작업이 자기 본위적 영웅주의나 값싼 계몽성의 대중화 작업에서 찾아지지는 않았다. 그러한 방법은 무엇보다도 한 시대의 이상을 위해 공감하고 시간을 공유했던 이들의 그 시간을 가장 왜소하게 하는 보편주의 혹은 교양주의적 폭력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새로움이라는 것이 사유와 방법의 확장을 매개로 하는 한 시대 전체 구성원의 것이기도 하니까 더욱 그렇다.
이러한 과제에 맞닥뜨려 한국시는 인식의 예각성을 심화해 왔다. 국내적으로 일련의 민주화 과정이 성과를 거두었고 국외적으로는 종래의 기율과 방법이 탄력과 영향력을 일정하게 소진하면서 탈근대론들의 줄기찬 도전에 직면하기도 하였지만, 우리 시단은 일상과 욕망, 육체와 정체성을 탐색하면서 시적 형상을 생태, 지역, 젠더 같은 근대의 항구적 타자들을 향하게 되었다. 그동안 민족과 민중에 집중적으로 할애했던 근대적 시선을 다양하게 분산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지금도 인류는 전쟁과 기아와 빈곤 같은 20세기적 공적과 힘겹게 싸우고 있다. 새로운 천년 이후 폭넓게 제기된 이러한 담론적 진경들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완성해야 할 근대적 과제가 산적해 있음을 잘 알려 준다.
이러한 의제들을 제기했던 시대를 지나 우리는 최근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전혀 새로운 경험을 가진 작가와 시인들의 등장과 주류화를 경험하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페미니즘의 성세聲勢와 함께 소수자들의 존재 방식에 대한 탐구와 형상화 의지가 강하게 대두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언필칭 2010년대의 이 소수자 담론은 일국 차원의 노동, 젠더, 종교, 언어, 육체 등에서 갈라지는 범주 외에도 국경을 넘어서는 탈북자, 난민,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민 여성 등 다양한 인적 구성을 포괄하게 되었다. 한국시는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는 범주의 형상적 성취로 성큼 나아간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이후 활발해진 번역과 해외 행사 등으로 인해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의제는 이제 제철을 만난 듯하다. 활발한 인적 교류와 함께 작가들의 해외 진출도 늘어나면서 한국문학은 세계 무대의 변방에서 훌쩍 벗어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출판 시장의 불황과 디지털 혁명에 의한 스마트폰의 일상화로 문학의 수요는 아무래도 급감을 면치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학적 정예들의 활발한 성취는 한국문학의 눈높이를 훤칠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출판사들의 잇따른 팟캐스트 출범은 작가들을 마이크 앞으로 불러냈고 비평 현장은 새로운 매체인 유튜브로 옮겨 가기도 했다. 이른바 본격문학이 정체하는 동안 다양한 모습의 장르문학이 강세를 띠기도 했다. 담론적 측면에서는 문학의 정치와 윤리가 표나게 강조되었고, '세월호 사건'으로 비롯된 죽음과 기억과 애도의 형식으로서의 근대사에서 빚어진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다시 설계하는 쪽으로 문제 제기를 꾸준히 해 가게 된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 시대는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한국문학의 전환기이자 난숙기로서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제 문학계에서 지속적으로 떠돌던 '문학의 위기'라는 풍문은 그 후 이루어진 활발한 작품적 성취와 비평적 논의로 거의 무색해져 간 것 같다. 물론 문학의 위기라는 진단이 수용층 축소 혹은 문학과 상업자본의 공고한결속을 지적한 것이라면 사실에 부합하겠지만, 그럼에도 문학을 이루는 평행 레일인 창작과 비평 활동은 지난 21세기 20년 동안 호황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 가운데 우리가 가장 이색적으로 치른 경험은 '문학'이라는 현상과 행위를 둘러싼 여러 층위의 컨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점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명작이나 고전은 쓰여지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근대적 주체로서의 작가의 위상은어떠한가? 작가는 고독한 창조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매체 권력과 독자 대중을 매개하는 미적 세공사의 직능으로 강등되고 있지 않은가? 상품 미학의 현란한 후광 속에서 모든 가치가 위계화되고 서열화되는 시점에서, 문학에서만큼은 아직도 작품성이 '좋은 작품'의 규준이 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의 연쇄는 문학이 생성되고 유통되고 소비되는 과정과 그것을 가능케 한 제도 혹은 권력에 대한 문제 제기를 문학사에서 거의 처음으로 본격화한 것들이다. 결국 이러한 인식론적 · 매체적 변화 양상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적 비극성과 새로운 전망을 일구어 가는 세대론적 욕망을 다시 장전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과장된 것의 낯선 출현을 통한 대체 욕망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의 사유와 실천을 통해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와 있는 시적 지형과 의제의 다양한 분기들을 실존적으로 감당해 가야 한다. 이 새로움 또한 오랜 후에 간단없는 비평적 성찰을 통해 문학사의 일부가 되어 갈 것이겠지만 말이다. ▩ (p. 161-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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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 2022-가을(26)호 <criticism/ 유성호> 에서
* 유성호/ 199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등단, 평론집『서정의 건축술』등, 현)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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