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中
박상륭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 발췌 셋
<제 3장 제22일> 中
글쎄 나는, 울지는 않았다. 미음을 끓여 소반에 받쳐 왔던, 저 죽은 옌네의 친구가 또한 그녀의 죽음을 알고, 울며 돌아갔다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와서, 곡비哭婢들처럼 울어댔으나, 나는 울지 않았다. 그녀들은, 저 죽은 것을 목욕시키며 그녀에의 추억을 넋두리해댔으나, 난 울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삽과 괭이를 찾아 들어, 그녀가 자기 묘지 삼기를 바랐던 바로 그 자리에, 그 흙을 퍼내기나 시작했다. 나는 울지는 않았다.
그리고 석양이 비꼈는데, 나는 저 싸늘한 것을, 수의도 없이, 알몸인 채 두 팔에 안았다. 그녀의 친구들은 곡비들처럼 무덤 전에 둘러서 있었다. 내 팔 안엔, 이 세상에서 그중 아름다웠던 것 중의 한 개가 안겨 있고, 그 얼굴 위에로, 배꼽으로도, 석양이 눈물처럼 번지고 들었다. 그녀의 눈은 감겨 있어서 자는 것 같았다. 나는 울지는 않았다. 그것은 싸늘했으며 공허했다.
나는 그리고, 저 고왔던 것을 안은 채, 무덤으로 내려갔다. 흙으로 돌아갈 것임을, 흙을 취했었음을, 돌아갈 것임을, 흙으로여.
그러나 아직 나는, 흙을 밀어 저 벗은 몸을 덮어주지는 않았다. 그런 대신 나는, 그녀의 머리를 내 무릎에 괴어놓고, 그 무덤에 앉아버렸다. 그리하여 이제, 그 죽음 속에 울려 보낸, 내 혀의 말로하여, 몸 떠난 그녀와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흙이여, 너의 젖으로 키운 것 중에, 그중 어여쁜 것 하나가 네게 돌아갔으니, 저 보석으로 하여, 너의 부가 더해졌겠구나. 흙이여, 이제는 그대 가슴은 안온히 할 때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울지는 않았고, 울지는 않았다. (p. 555~556)
<제 5장 제34일> 中
나는 이제는 완전히 동떨어져, 한 덩이의 식은 밥도, 한 방울의 수분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 이슬을, 어쩌다 내리게 될지도 모르는 부드러운 비를 핥으면 되리라. 이제는 그리고, 까마귀 우짖음이며, 어쩌다 부는 바람이 내 둥지를 흔드는 것이며, 갈증 돋우는 햇빛, 밤의 모든 외로움과 추위를 감내해야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자청했고, 그러면서 내가 순화되어, 어느 때 탈바꿈되어지기를 바란 것뿐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나는, 땅으로부터 떠난 것이다, 라고 나는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드디어 나는, 나를 구속하고, 마음으로 시달리게 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은둔을 성취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쨌든 죽음은 은둔이다. 내가 숨 쉬는 대기는 향기로우며, 햇볕은 쏘기는커녕 달빛처럼 부드러이, 내 어깨 언저리에다 구릿빛 이슬을 바르고 있고 까마귀들은 면계面界의 아픔은 잊어도 좋을 때라는 것을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없는 시력으로, 그렇기 때문에 시야에 장애를 갖지 않고 더 넓이, 저 세계를 내려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소리 중에서도 아름다운 것, 냄새 중에서도 향기로운 것, 감촉 중에서도 그중 부드러울 것만을 위해 내 혼은 열려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 아래로는 숲이 흐르는 소리가 쉼 없이 들리고, 나는 그 바닥에 멱 감은 어떤 잎 그늘 그 속에 깊이 그늘을 드리웠으나 수면으로 살포시 뜨는 그늘, 그리하여 드디어 나는, 죽음 위에 정박한 작은 배로구나. 죽음이여, 그러면 내게 오라. 내가 그대 위에 드리운 그늘을 온통 밤으로 덮어, 그 그늘의 작은 한 조각을 지워버리도록, 육중한 어둠이여, 이제는 오라, 까마귀들로 더불어, 그러면 오라. 죽음이 거느릴 저 아리따운 아씨들, 빛이 빛이 아닌 빛으로 깃털을 장식한, 저 까마귀들로 더불어, 흑단 같은 발을 내디뎌 내게 이제는 오라, 나만의 것이었던 조그만 내 그림자는 내게 무겁던 것이다. 그 그림자를 이제는 내게서 지워 없애주기만을, 나는 그리하여 사망死亡으로써 사망思望하기 시작한다. (p. 692~693)
<제 5장 제39일> 中
눈을 잃었을 때 허기는, 눈만 잃은 것이 아니라, 허기는 모든 얼굴까지도 다 잊고 만 것이었다. 촛불중이며, 죽은 수도부며, 소나무며, 샘이며, 존자며, 그의 문하생이며, 늙은 촌장이며, 사막이며, 해며, 달이며, 아 저 안개비며, 그런 모든 얼굴들을 잃고 만 것이었다. 할 수 있으면 그러나 한 번쯤만 더, 저 비처럼 내리던 가얏고 산조 밑에 누워, 비처럼 흠씬 좀 젖었으면 싶다. 그랬으면 그 죽음은, 하늘 더디 복사꽃 핀 곳에 바람이었다가, 그 꽃잎들 함께 흩어져 내릴 것은 아니겠는가.
지금은 마지막으로, 무엇엔가 한번 기도 같은 것이라도 하고 싶고, 또 나를 수호하는 어떤 신위를 두고 명상이라도 하고 싶으나, 그러나 이 순간에 이르러 나는 내가 고아였었다는 생각밖에는 더 들지 않는다. 기도를 바칠 곳도, 불러내 다정스레 앉을 친구도 없는 것이다. 아 그러나 까짓것 그만두자. 허지만, 아 그렇지, 내가 이 세상을 살고 갔다는 그 마지막 울음이라도 한번 울어볼 일이지, 어쨌든 맨 처음 살러 나왔을 때의 최초의 말이 그것 아니던가. 그 최초에, 모든 우리는 그리고, 천덕스러이도, 으앙으앙 하고 울었을 터여서, 그래서 내가 이 마지막으로 또한 그렇게 울어보려니, 어쩐지 그렇게는 발음이 되어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래 울음도 늙고 복합화해진 것이다. 터져 나오는 울음의 서두란, 그저 의미도 없는 듯한 감탄사에, 보다 한이 맺히고길어진 것, 그런 것이었다. 오오, 우우, 우오 그래, 울음도 늙은 것이다. 서른세 해 늙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 늙은 울음이 아랫배로부터 울려 나왔고, 그것은 숲으로 퍼져나가, 한없이 여울져가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다. 그 울음은 그리하여 소리를 잃어버리고, 다시 쏟겼다간 다시 꼬리를 잃는 것이었다. 까마귀들도 더욱더 울고 있구나. 숲에는 운무라도 끼었을라. 울다가 내가, 까무라쳐 죽을 것인가.
오오 우오 우오
갸 갸 갸
그러나 한번 소리내기 시작해서, 그 숨이 자지러지고, 다시 심호흡해서 시작하여, 그 소리가 목구멍으로 기어드는 그 수없는 울음에서마다 나는, 그것이 이상스럽게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나 발견하고 말았다 옴.
아, 울음의, 소리의, 언어의, 숨의, 존재의, 비존재의, 저 깊은 속에 담긴 것은 저 울음, 저 하나의 소리였다. 처음에 소리였다가, 소리 자체가 소리를 삼켜버려, 소리가 소리가 아니게 하는 소리, 처음에 숨이었다가, 숨 자체가 숨을 삼켜버려, 숨이 숨이 아니게 하는 숨, 말을 말이 아니게 하는 말, 존재를 존재가 아니게 하는 존재, 비존재를 비존재가 아니게 하는 비존재. 옴. 말. (p. 707~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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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_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초판 1쇄 발행 1986.8.16 // 3판 2쇄 발행 2020. 7.15. (문학과지성사) 발행
* 박상륭/ 1940년 전북 장수 출생,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수학, 1963년 단편소설「아겔다마」로 사상계 신인상 수상. 소설집『열명길』『아겔다마』『평심』『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소설법』, 장편소설『죽음의 한 연구』『칠조어론』『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잡설품』, 산문집 『산해기』, 동리문학상 수상, 2017년 7월 1일 일흔일곱을 일기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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