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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_조선의 그림과 제화문_영모도(발췌)/ 임희지(조선후기 문인화가)

검지 정숙자 2022. 6. 12. 16:48

 

    조선의 그림과 제화문題話文(발췌)

         영모도翎毛圖 

 

      유종인

  * 조선 그림의 여러 장르 중에 그 터럭과 깃털을 가진

숨탄것들을 주 대상으로 그리는 것이 영모도翎毛圖이디.

   본문 p_15.

 

 

    수월당水月堂 임희지林熙之의 <노모도老貌圖>다. 그는 조선후기에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리는 역관 출신의 문인 화가로, 그 솜씨는 당대 예림의 총수 격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에 필적할 만하단 소릴 들었다. 그의 난초 그림은 날렵해서 교태가 흐른 요염妖艶함마저 드리웠고 미색이 줄줄 흐르는 여인의 둔부臀部처럼 교태스러운 난엽蘭葉의 선묘를 통해 아찔한 상상을 일으키는 난초도 쳐냈다. 그는 얼굴이 잘났고 노는 짓이 해학과 배짱과 풍류가 넘쳤다. 벼슬이라 봐야 역관譯官을 지낸 중인 신분이 고작이었지만 배포가 두둑해서 가난 속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결기가 엿보였다. 한 번은 친구들과 뱃놀이를 나갔다가 거친 풍랑을 만나고 말았다. 다들 하얗게 질려 있는데도 수월당만큼은 그 일엽편주 속에서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한다. 기겁한 친구들이 붙들어  앉히며 만류했지만, 그는 오히려 나무라는 친구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죽음이야 언제든 닥칠 수 있지만 이런 장쾌한 광경은 평생 처음 본다. 어찌 춤을 안 추고 배기겠는가'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그의 풍류남아로서의 기개는 남의 헐뜯는 말에도 개의치 않았다. 오막살이 누옥陋屋에 살면서도 그는 자그마한 마당에다 연못을 팠다. 물이 나오지 않자 그는 쌀뜨물을 부어 놓고 밤마다 쳐다보았다. 누가 의아해서 물으니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달이 물의 낯짝을 가려가면서 비치던가.' 다시 호방하게 일갈했다. 그러한 수월헌水月軒이니 한 마디로 풍류를 아는 기인의 의연한 풍모였다.

  이 그림은 희귀한 상상의 동물을 담고 있다. 상상의 동물로서의 용은 수도 없이 그려졌으나 터럭을 우북하게 지닌 영모翎毛로서의 상상 동몰이 그려지긴 희귀한 사례다. 지혜를 지녔으되 강퍅하지 않고 용맹을 갖췄으되 늡늡한 웃음이 있으며 신통력을 지녔으나 뽐내지 않는 경우처럼 노모老貌는 붉은 코로 마주하는 상대의 경계심을 무장해제시킬 것만 같다. 저잣거리의 술 꽤나 좋아하여 강퍅하고 모진 심사가 없을 것 같다. 가납사니나 야차처럼 해코지를 벌이는 족속은 아닌 듯싶다.

  중국의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모는 상상의 동물로 부엌에서 음식을 훔쳐 먹다가 나중에 부엌을 지키는 신의 반열에 올랐다 한다. 일종의조와竈王의 성격을 지닌 상상 속 동물인데, 그 형상이 매우 친근하면서도 독특하다. 전체적으로는 사자개처럼 그렸고, 몸은 시커먼 털북숭이고 발톱은 호랑이처럼 두툼하고 그 끝이 휘어 날카롭다. 눈은 동그랗게 치켜뜬 게 무섭다기보다는 정감이 감돈다. 혀와 코는 붉은데 왠지 술을 좋아하는 해맑은 노인의 인상이다. 개 중에서도 악귀를 쫓는다는 삽살개를 연상시키기도 한데 상상 동물이라기보다는 주변 어디에선가 불쑥 마주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붙임성이 느껴진다.

  화폭 좌측 상단의 노모老貌의 북슬북슬한 등허리 위의 화제는 이 상상계 혹은 신선계 영역에 능놀 것 같은 숨탄것에 대한 묘사가 활달하고 친근하다.

 

 

  圖黃目仰其鼻奮髥 吠舌威見齒舞

  (도황목앙기비분염 폐설위견치무)

  그려진 누런 눈에 머리를 쳐들었고 코는 수염을 드날리며 짖는 소리가 진동하여 이빨이 춤추는 듯 보인다.

  其足前其耳左傾 右躑走見

  (기족전기이좌경 우척주견)

  발 앞의 귀는 왼쪽이 기울었고 오른쪽은 땅을 밟고 서서 나아가는 듯 보이고

  尾雖猶而和蛬其戱 嚴嚴高左護

  (미수유이화공기희 엄엄고좌호)

  꼬리가 마치 원숭이 같고 귀뚜라미와 어울려 놀지만 엄숙하게 높이 앉아 지키며

  熱几啼呼顚諦 走百鬼

  (열궤제호전체 주백귀)

  사납게 몇 번 짖고 엎드려 살피니 온갖 귀신이 달아나네.

 

 

  술 잘 마시는 삽살개 같은 노모에 대한 묘사가 화제 속에서도 재밌게 친견되고 있다. 외모와 자세, 그리고 그 일상의 버릇 같은 생태에 대한 적바림은 마치 상상계의 동물이 아니라 현실계의 다정한 반려의 반열 위에 성큼 데려다 놓은 듯하다. 익살과 너스레가 있는 동물이니 여느 무뚝뚝하고 강퍅하기만 한 장삼이사와는 사뭇 속이 다른 축이다. 그 수염을 휘날리는 코와 짖을 땐 이빨이 춤을 추는 듯하다니 그 호활한 기상이 엿보이고, 꼬리는 말리고 능란하게 휘감는 듯 총채 같은데 그 어울림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귀뚜라미와도 능노는 걸 즐긴다니 이 또한 시비분별이 승한 인간과는 다른 무애無碍한 짐승의 속종이다. (p. 18-21)

 

   * 블로그주: 그림은 책에서 감상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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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파 MUNPA』 2022-여름(64)호 <유종인의 미술 이야기> 에서

  * 유종인/ 1996년『문예중앙』으로 시 부문 &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시조 부문 &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미술평론 부문 당선, 시집『숲시집』외 몇 권, 시조집『얼굴을 더듬다』, 산문집『염전』『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