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분홍이 익어가는 동안 외 1편/ 김밝은

검지 정숙자 2024. 6. 28. 01:55

 

    분홍이 익어가는 동안 외 1편

 

    김밝은

 

 

  봄이면, 할머니는 진달래꽃을 따다 술을 부어 꽃밭 귀퉁이에 묻어놓고 봄날의 향기로 무르익을 때까지 들여다보곤 했다

 

  개구리울음소리가 마당까지 올라오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잘 익은 분홍을 술잔에 담아 상을 차려놓고는 나쁜 놈 나쁜 놈 질펀한 목소리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런 날은 유난히 반짝이는 밤하늘이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아서 나쁜 놈이 되어버린 아버지 얼굴이 더 궁금했다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건드려주곤 해서 혼자 있을 때면 하늘에 가닿는 비밀을 키우며 두근거리던 날들이 있었다 한 번쯤 꼭 만져보고 싶던 얼굴

 

  세상의 간절함을 모두 모아도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이 있다는 것을 터득해 버린 후 쑥쑥 자라던 상상력은 산산조각이 났고 나도 가끔 고개를 숙인 채 나쁜 사람 나쁜 사람 곱씹어보는 날들이 늘어갔다

 

  새까만 울음을 박박 문지르면 맑은 눈물이 될까, 생각하는 사이 모른 척 고개를 돌리던 슬픔이 잠깐 윤슬처럼 반짝일 때도 있었다

     -전문(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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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코메트리

 

 

  냄새나는 하루를 쏟아놓고 가을을 흔드는 은행나무를 바라보던 문장들이 터벅터벅 다가오는 날 나는 당신에게 더 골똘해지는 중이지

 

  욕심을 부리고 싶어도 당신을 만질 수 없는 손금이어서 상상만으로 건드려보는 내력이 가슴에 턱 자리 잡기도 하지 시간이 더는 나를 해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름에 손만 얹으면 전생의 전생까지 환하게 읽히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고 아슴푸레한 시절을 들여다보면 언젠가 그늘의 장막 아래서 당신은 시를 들여다보고 나는 그저 노래나 한 뼘 만지작거리고 있을지도,

 

  허공을 더듬으며 추락하는 숨결처럼 울고 싶을 때도 당신 이름에 어깨를 기대지는 않지, 않지가 않기가 되기도 하지 가위눌리는 밤은 계속될지 모르지만

 

  나란히 한 곳을 바라보며 입꼬리 살짝 올라가던 풍경만은 꼭 움켜쥐고 있지

      -전문(p.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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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새까만 울음을 문자르면 밝은이가 될까』에서/ 2024. 6. 10. <미네르바> 펴냄

김밝은2013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술의 미학』『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 <미루> 동인, <빈터>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