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어증
강준철
사물들이 실어증에 걸렸다.
책들은 모두 책장 안에 서서 잠을 자고, 방바닥에 쌓아놓은 잡지들은 허리를 다쳐 일어나지 못한다. 기타와 카세트테이프와 청소기는 식물인간이 되어 누웠다. 여름 이후 목 디스크에 걸린 선풍기가 눈을 흘기고 있고, 종이로 얼굴이 막힌 코로나 마스크들은 몸을 움츠리고 눈치만 살핀다.
우리말 사랑을 외치던 가로막 두 개가 몹시 지친 듯 책장에 기대고 서 있다. 문지文知와 창비創批의 그 많은 시집들은 빈틈없이 몸을 붙이고 어깨를 꽉 끼고 있지만 아무 말이 없다. 학위기념패, 상패, 공로패, 감사패들은 상자처럼 쌓여 부끄러운 듯 헌 봉투 밑에 숨어 있고, 상장과 임명장과 표창장들도 장작처럼 포개져 불 탈 날을 기다린다. 피를 뽑아 엮은 논문들과 저작물도 장식품이 되어 열중쉬어다. 환갑을 넘긴 세계문학전집이 손길을 기다리지만 이 또한 먼지 앉은 장식품, 다 버려지고 불 속에 던져질 것들이다.
그래도 그중 사랑스러운 건 나의 시집들! 반짝이는 별은 환히 웃는 나의 손자들!
아, 저 허욕과 허영의 지식덩어리들을 어떻게 처리하나?
나도 실어증에 걸린다.
-전문-
▶해체의 상상력과 그러데이션의 언어(발췌)_염선옥/ 문학평론가
시적 주체는 실어증에 걸린 사물들과 "책장 안에 서서 잠을 자고" "허리를 다쳐 일어나지 못"하는 "방바닥에 쌓아놓은 잡지들", 그리고 여러 사물을 바라본다. "우리말 사랑을 외치"며 문단의 두 축이 되어온 문지文知와 창비創批의 "많은 시집들은 빈틈없이 몸을 붙이고 어깨를 꽉 끼고 있지만 아무 말이 없"고 "몹시 지친 듯 책장에 몸을 기대고 서" 있을 뿐이다. "사랑스런 나의 시집들"을 바라보는 시적 주체에게 자신의 시집도 "허욕과 허영의 지식덩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실어증에 걸린 '나'와 '너'의 결과물이 아니었나 하는 반성 어린 성찰이 여기서 제기된다.
*
우리 시단은 10년을 주기로 하여 '지금-여기'를 심도 있게 검토해 오면서도 실험시 등을 참여와 순수, 리얼리즘과 낭만주의 유파 속에 모아두거나 이분법적 대립 속에 가두어왔다. 강준철에게 새로운 실험을 향한 노력은 모더니즘이냐 포스트모더니즘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이 되는 전위가 시인의 정신에서 반등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의 도래와 모색은 예속을 거부하는 것을 기본정신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투적 형태에도 예속되기를 거부하고 문학의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초현실주의의 기본정신은 초근대성의 예술사라는 작은 울타리 속에 갇혀(오생근, 『초현실주의의 시와 문학의 혁명』, 문학과지성사, 2010, 13~14쪽)버린 것만 같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정신은 초근대성의 시대에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성이란 "어떤 작시作詩를 노리는 특수 분야가 아니라 모든 게 집중되는 중심점, 즉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친화성과 위화성,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모순되지 않게 느껴지게 하는 어떤 정신의 지점일 수도 있다."(트리스탕 자라 · 앙드레 므르통, 송재영 옮김,『다다/ 쉬르레알리스 宣言』, 문학과지성사, 2000, 247쪽)라고 강조하지 않았는가. (p. 시 191/ 론 207 ·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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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 2024-여름(94)호 <신작 소시집/ 신작시/ 작품폰> 에서
* 강준철/ 2003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새로운 외로움』『바다의 손』『푸조나무가 웃었다』등 다수, 저서『꿈 서사문학 연구』, <뿔> 동인
* 염선옥/ 2022년 ⟪서울신문⟫ ⟪조선일보⟫로 평론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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