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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같이 사라지다/ 황상순

바람같이 사라지다      황상순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풀숲 고인돌 밑에 들어 몸을 숨기고  가만히 문을 닫는다  이곳은 오래전에 숨겨놓은 비밀의 방  햇빛에 바래고 월광에 물들 때까지*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리라     -전문(p. 39)   * 褪於日光則爲歷史(퇴어일광칙위역사)    일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染於月色則爲神化(염어월색칙위신화)    월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출전: 이병주 대하소설 『산하』)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황상순/ 1999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름치 사랑』『사과벌레의 여행』『농담』『오래된 약속』『비둘기 경제학』등

당신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외 1편/ 이효영

You be good. See you tomorrow. I love you. 외 1편    이효영    오늘도 혼자 대형마트에 갔습니다 빈 새장 하나를 샀습니다   1.    진열장마다 가득한  세상의 모든 입술  어제 본 것들과 불쑥 돌출된 것들  많을수록 좋습니가 내일이 만개합니다   차곡차곡 장식된 나의 새장들이  천장 높이 퍼덕이고  언젠가 진짜  한 쌍의 노란 새 가지겠지만  나는 다시 만날 약속을 해 봅니다  내일 보자 그렇게  말하는 중입니다   2.   어떤 유머도 아름다운 노래를 이길 순 없겠지요  그래도 새장의 창살은  건치健齒 같아 좋습니다 고르고 건강한 날들  호두가 사탕인 줄 알고 빨아 대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알맹이 사르르 녹아들 순간을 기다리다   나는 어른의 목청을 가..

선미장식의 계단/ 이효영

선미장식의 계단      이효영    가파른 계단을 내려올 때, 나, 나 불현듯 깊다. 실체보다 무겁거나, 실체보다 빠르다. 계단을 타고 있지만, 계단보다 조금 더 앞이다. 쏠리는 각도는 전부, 갈무리하는 나,   가파른 계단을 내려올 때, 나, 비를 맞고 있는 것만 같다. 비의 한가운데 혹은, 비 자체로서 나, 다 떨어지지 못했다. 하늘과 땅 사이, 천둥의 한 점 발현과, 만물의 진동 사이, 그사이, 아니 비를 맞는 것이 아니라, 비의 메커니즘을 맞고 있는, 나,   실체보다 전진, 실체보다 전위, 실체보다 첨예, 가파른 계단을 내려올 때, 나는 최고로 섬세하다, 콧날이 살아 있다, 슉 슉 슉, 각도의 숨찬 소리도 들려, 고집스레, 비에서 쏟아지는 비처럼, 나를 뚫고, 나를 덮는, 나,   가파른 계단..

매지리 호수/ 김성수

매지리 호수      김성수    호수 낀 산책길에 벚꽃 잎이 날리면  하르르 날아가는 수많은 꽃나비들  눈부신 사월 시공時空에  춤사위가 고와라.   호수가 너무 맑아 하늘도 빠져 있고  하늘을 흐르던 구름도 빠졌는데  동동 뜬 구름장들을  물오리가 건져 먹는다.   사람도 나무들도 물구나무로 서서  온 하루 그렇게 빠져 있어도  모두가 흥겨워하는  매지 호수 산책길.   호수에게 살며시 물어 보았다.  무엇이 우리 맘을 사로잡고 있느냐  호수는 빙그레 웃기만 한다  인자한 어머니 미소와 같이.     -전문(p. 68)   ----------------------- * 『다층』 2024-여름(102)호 > 에서 * 김성수/ 1984년 ⟪조선일보⟫ 동시, 1994년⟪평화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

누군가 툭, 운다/ 박희연

누군가 툭, 운다     박희연    우리는 봄마다 목련을 센다.  우리는 우리였지만  저마다 혼자 그 꽃을 센다.  수를 세는 일은 늘 지루해  숫자가 지루할 때쯤  지루한 목련이 떨어진다.  목련이 지나간 골목 철쭉이 피고  철쭉이 지나간 골목 장미가 피고  장미가 지루할 무렵 장마가 온다.  그 골목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애인은  두 번째 괄호를 열고 시름에 잠긴다.   세상에 해명해야 할 일들은  애써 찾지 않아도 꽃처럼 피고 지는데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괄호를 친다.  다시 우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저마다 혼자 누워 그 소리에 젖는다.  숨죽이고 기다리던 누군가  툭, 운다.  한 걸음 경계 너머 저 바다  한 생 버려져 녹이 슨 저 괄호   장마가 지나간 골목 풀벌레들 울고  풀벌레..

몽돌/ 김현숙

몽돌     김현숙    물은 천리를 흘렀는데  그대 한 자리에 앉아  천 날의 물결을 깎았는가  가파른 주의주장도 누그러뜨리고  날 선 입도 잠잠해졌구나    가끔 자갈거리며  해소기침 끓는 소리  수 만 바람과 부대끼었나  엎어지고 깨진  파도의 집채 가라앉아서    -전문-  ---------------------- * 『한국시학』 2024  여름(70)호 에서 * 김현숙/ 1982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쓸쓸한 날의 일』『꽃보라의 기별』『물이 켜는 시간의 빛』『소리 날아오르다』『아들의 바다』외 다수

사람이 위안이다/ 박재화

사람이 위안이다      박재화    살다보면   사람에 무너지는 날 있다  사람에 다치는 날 있다   그런 날엔  혼자서 산을 오른다  해거름까지 오른다   오르다 보면  작은 멧새 무리 언덕을 넘나든다  그 바람에 들찔레 흔들리고  개미 떼의 나들이도 보인다   그림자 없이 내려오는 숲속  순한 짐승들  어깨 비비는 소리 가득하여    사람에 무너지는 날에도  사람은 그립고  사람에 다치는 날에도  사람은 위안이다    -전문(화보 & p. 78-79)   ---------------------- * 『한국시학』 2024  여름(70)호 에서 *  박재화/ 1951년 충북 출생, 1984년 『현대문학』에 「도시의 말」연작으로 2회 추천완료 등단, 시집『도시의 말』『우리 깊은 세상』『전갈의 노래』『먼..

새 2/ 최금녀

새 2     최금녀    새를 모았다  새의 어깨에  감정이 돋아날 때까지 닦아준다   감정이 살아난 새들은 이따금씩  눈을 감은 물고기 몇 마리  맹고나무 숲 노을 한 묶음  양말을 신은 바오바브나무 발가락 몇 개도 물고 온다   흔들릴 때마다  나는 새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아픈 과거나 고향을 열어보지 않는다   세어보지 않아도  기억하지 않아도  새들의 이름은 새이다   지친 어깨를   굳어버린 슬픔을  부드러운 헝겊으로 닦아준다   이름을 불러준다.    -전문(p. 132)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최금녀/ 1998년『문예운동』으로 등단, 시집『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외 6권, 활판시선집『한 줄, 혹은 두 줄』 외1권

내 안에 외 1편/ 임솔내

내 안에 외 1편     임솔내    내 안에 사람을 들인다는 거  내 안에 그대라는 강물이 흐른다는 거  날마다 흐벅진 산山이 내 안에  자라고 있다는 거  '잘 살자' '잘 살자' 자꾸만  말 걸어 온다는 거  흥건하고  아늑하고  아득하다는 거   산다는 건 견디기도 해야 하는 거  그대의 찬 손 내 안에 쥐면  떨어뜨릴 수도 없는 눈물이  고인다는 거  꺼내 보이기도 벅찬 내 마음  정갈한 삶 위에  곱다시 얹어본다는 거   저 아련한 거처  내가 할 수 있는 위로가 없어  잊을 수도 놓을 수도 없어  나도 그럴 거라는 거   허나,  그대라는 편질 읽으면  왜 이리 울어지는가  -전문(p. 시 32-33, QR코드 & 사진)      -------------------    파란 나비    "하..

하이바이, 19(+해설)/ 임솔내

하이바이, 19      임솔내    섬처럼 사느라  엄마를 내다버린 곳에 가지 못했다  허연 칠순의 아들이 구순의 어미를  음압 병동으로 옮기는 걸  멀리서 바라만 보는 모습 TV에 뜬다   꿈처럼 자꾸 도망가라 멀어져라  혼밥으로도 이미 아득해졌을 걸  헤지고 굽어진 길 어귀에서  서로 기다릴 텐데   눈에서조차 멀어지면  어쩌자고  꽃은 자꾸 떠서 지고 있는데   이제 가야지  엄마 버린 곳     -전문-   해설> 한 문장: 화자는 어머니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자기가 "엄마를 내다버린" 것으로 스스로 간주하고 그 책임을 자신에게 묻고 있다. 즉 화자는 어머니로부터 "도망가라 멀어져라" 떨어져 나온 것을 어머니를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 어머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