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
Ⅲ 현묘지도 즉 풍류도
「고운 최치원의 풍류 이해와 삼교 인식」 中
고영섭/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최치원은 신라 경문왕 8년(868)에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아버지로부터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가서 힘써 공부하라"는 말을 들었다.최치원은 '남이 백 번하면 나는 천 번을 하여'人百己千9)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결과 그는 선주宣州 율수현위凓水縣慰가 되고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때마침 최치원은 황소黃巢의 반란(875~884)이 일어나자 병마도통兵馬都統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25살 되던 881년(唐 廣明2, 辛丑) 7월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격서檄書 한 장으로 난적亂賊을 항복시켰다.10)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오기 직전 14년간 재위하였던 경문왕(응렴膺廉)이 874년에 승하하였다. 이어 한강왕이 11년간 재위하였다. 최치원은 16년간 당나라에 머물다가 28세 때인 헌강왕 10년(884)에 신라로 돌아왔다. 당시 신라는 이미 형세가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정강왕이 재위 1년 만에 승하하자 이어 진성여왕이 즉위(887~896)하였다. 왕위에 오른 진성여왕은 재위 10년 동안 각간 위홍魏弘과 대구大矩 화상에게 신라의 상중하대 안목(절목, 요목)을 담은 『삼대목三代目』 편찬을 명하는 등 신라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 시대 이래 대표적 화랑이었던 국선 응렴膺廉과 효종랑孝宗郞이 소환되었다. 헌강왕대에 귀국한 최치원은 진성여왕 재위 시절에 펼쳤던 전통문화의 선양 정책에 힘입어 진력하였다. 그가 응렴 즉 화랑 출신의 경문왕을 기리는 「난랑비서」를 쓴 시기도 이때로 추정된다. 하지만 당시 신라 정국은 왕거인王巨人의 정치적 탄압(888), 원종元宗 애노哀奴의 난亂(889), 견훤의 후백제 건국(892) 등으로 문란하였다. 이 시기의 최치원은 중앙의 관직을 받아 활동하였다. 894년에는 그는 진성여왕에게 상서장上書莊에서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건의11)하여 신라 정계를 개혁하려 하였다. 하지만 신라 귀족들은 변화를 싫어하였고 신라 사회는 피폐해져 갔다. 당시의 비참한 모습을 최치원은 "악 중의 악이 없는 곳이 없으며 ,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다"12)고 표현하였다.
결국 최치원은 기울어가는 신라의 정세를 개탄하면서 외직을 청하여 태산군太山郡, 부성군富城郡, 천령군(天嶺郡, 함양) 등의 고을 태수를 지냈다. 하지만 난세가 계속되자 결국 그는 벼슬을 버리고 유랑하였다. 만년에 최치원은 가야산 해인사에서 친형인 정현定玄법사와 도우道友를 맺고 기거를 함께 하다 여생을 마쳤다. (p. 114~116)
9) 崔致遠, 『桂苑筆耕』, 「自書」. "아버님의 그 엄격하신 훈계를 마음에 새겨, 감히 잊지 않고, 쉴 새 없이 또렷이 깨어서 〔현자懸刺〕 허둥거리지 않고 〔무황無遑〕 오로지 아버님의 뜻을 받들기 위했던 바, 실로 '남이 백 번을 하면 나는 천 번을 노래하여' 여러 지방을 다닌〔관광觀光〕지 6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금방金榜에 〔이름을〕 걸게 되었다."〔臣佩服嚴訓, 不敢弭忘, 冀諧養志, 實得人百己千之, 觀光六年, 金名𤗐尾/ 신패복엄훈, 불감미망, 현자무황, 기해양지, 실득인백기천지, 관광6년, 금명방미〕
10) 李奎報, 「白雲小說」 제3則, 황소는 "천하 사람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 땅 속의 귀신까지도 가만히 베어 죽이려고 의론하리라"는 대목에 이르러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평상에 내려 앉았다고 한다. 황소의 마음 깊은 속〔폐부肺腑〕을 찌른 최치원의 글 힘과 말 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1) 崔致遠, 「孤雲先生事蹟」, 『崔文昌候全集』, p. 424.
12) 崔致遠, 「海印寺妙吉祥塔記」, 『崔文昌候全集』, p. 212. "惡中惡者, 無處無也, 餓殍戰骸, 原野星排"(악중악자, 무처무야, 아표전해, 원야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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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사학 철학』에서/ 2024-가을(78)호 <사학_고운 최치원의 풍류 이해와 삼교 인식> 에서
* 고영섭/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불교철학, 인도철학)와 동 대학원 불교학과(인도불교, 한국불교) 석/박사과정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한국철학) 박사과정 수료, 논저『한국의 불교사상』『붓다와 원효의 철학』『한국불교사』『한국불교사연구』『한국불교사탐구』『한국불교사궁구』(1~2), 『한국불학사』(1~4),『한국의 불교사상』『삼국유사 인문학 유행』『원효, 한국사상의 새벽』『원효탐색』『한국의 사상가 10인 원효』(편저), 『분황 원효의 생애와 사상』『분황 원효』『불학과 불교학』『한국사상사』등 다수, 현)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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