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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의 전설 외 1편/ 황정산

도마의 전설 외 1편     황정산    단풍나무로 만든 도마가 있었다  백정 무태의 도마였다  크기와 무게와 그 견고함으로  단연 도마의 왕이었다  수많은 칼질에 피와 살이 파고들어  이것으로 모진 학대를 견딜 수 있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도마는 성벽 위에 올려져   잠시 방패가 되었다  조총 탄환이 박히고 불에 그을렸지만  아직 쓸 만한 도마는 다시 칼을 받았다   오랜 세월 후  갈라지고 부스러져 옹이 부분만 남은 도마는  고임목이 되어 창고 문틀을 받치고 있었다  한 떼의 동학군이 관아를 습격하다  석화되어 단단해진 이 목재를 발견하고  공들여 깎고 기름에 튀겨 화승대 총알을 만들었다  도마가 이제 피와 살을 파고들었다   도마는 없다  박물관에도 역사책에도  도마는 보이지 않는다  도마들은 남..

블랙맘바/ 황정산

블랙맘바      황정산    돈다발 사이에서 너를 만났다  악당 빌을 죽이는 영화에서였다  뱀을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권법보다 칼보다 더 민첩하고 예리하게  눈먼 것들을 죽이고 있었다   주)  블랙맘바는 아프리카에 사는 독사이다  맹독을 가진 이 뱀은 아주 빠르기도 해서  치타를 뒤쫓아가 물어 죽인다고 한다  아프리카 사지의 개체수가 줄어든 것도 이 뱀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 보고된 사실은 아직 없다   코끼리를 물어 죽이고 먹지 않는  정의를 위해서 눈을 어둡게 칠한  검은 입속에 희생자의 공포를 감춘  우리는 모두  잽싸거나 치명적이거나     -전문-   해설> 한 문장: "블랙맘바"는 알다시피 맹독을 지닌 눈과 입만 검은색을 띤 코브라과 뱀으로 잽싸고 사납기로 유명하다. 영화 『킬빌』..

삼덕동/ 이인원

삼덕동      이인원    아마 어느 초여름 저녁 무렵이었을 것이다   시멘트 바른 마당에 온 가족이 모여 있었는데 목이 늘어진 러닝셔츠 차림의 엄마는 살강에 남은 밥을 올려두고 수돗가에선 큰언니가 설거지를 막 마친 참이었다 여동생 둘이서는 공깃돌 놀이를 하고 나는 평상 한쪽 끝에 반쯤 누워 있었는데 마침 그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들이 이리저리 가볍게 흔들렸다   왜 유독 그 그림인지 알 수 없는, 자기부상 열차처럼 기억의 철길에서 살짝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손바닥을 벗어나 다시 손바닥으로 안착하는 반질반질한 공깃돌에 숨겨졌을지도 모를 이미 예정된 궤도, 혹시 그날 신비한 磁性에 이끌려 마당을 슬쩍 빠져나온 내가 지금의 나를 한참 지켜보다 갔던 것일까   가끔 살강에 올려 둔..

위대한 유언, '나를 화장하라!'/ 강소연

위대한 유언, '나를 화장하라!'     강소연/ 동국대 징계위원회 위원    경주에 가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오는 엄청나게 큰 반구형 왕릉들이 인상적이다. 옛 왕경의 중심이었던 황룡사지의 서쪽 방향으로 약 150여 개가 넘는 거대한 왕릉들이 즐비하다. 대릉원(황남대총, 천마총, 미추왕릉 등)을 비롯하여 금관총과 봉황대 등의 고분군은 역대급 규모를 자랑한다. 고분의 크기를 보면, 길이(또는 지름)가 20-30미터에 높이는 8-12미터의 보통 크기가 있는가 하면, 길이가 120미터에 높이가 24미터에 달하는 황남대총과 같은 초대형 고분도 있다.(도판 15) 왕릉에서는 왕의 시신을 장식하였던 금관, 허리띠, 칼, 관모, 신발, 귀걸이 등 다채로운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덤 내부를 관람할 수 있게 공개해 ..

한 줄 노트 2024.10.29

탑과 호국 신앙/ 강소연

탑과 호국 신앙     강소연/ 조계종 성보문화재 위원    "나는 죽은 뒤에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교를 받들고 국가를 수호하리라. "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룩한 문무왕이 살아생전 입버릇처럼 하였던 말이다. 그는 왜구 출몰 지역인 감포 해변에 절을 짓고 나라를 지키는 상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절이 완공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언대로 그의 유골은 감포 앞바다의 작은 바위섬(대왕암)에 뿌려졌다.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고 이름 지었다. 감은사의 본래 이름은 '진국사鎭國寺'였다. '진국'이란 '진호국가鎭護國家'의 줄임말로 '적을 진압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다. (p. 240) ---------------------------- * 『문학 사학 철학..

한 줄 노트 2024.10.29

한하운 송(頌)/ 임동확

한하운 송頌     임동확    단지 음력 삼월이면 진달래 피는 북위 사십 도의 고향,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택한 김포 공원묘지 한구석  결코 그 누구와도 나눠 가질 수 없는 기나긴 슬픔과 고통의 봉분 속에 영원한 난민難民 한하운이 누워있다  아무래도 납득이 안 되는 날벼락 같은 운명을 잠시라도 잊고자 음독飮毒하듯 독주를 마시며 흘리며  젊은 날 북경, 산해관, 몽고사막, 무주, 양자강, 상해, 남경, 소주, 요동, 발해, 대련, 여순 등을 다리지 않고 떠돌던 한 국외자가,  죽어서도 이루지 못할 첫사랑 같은 유월의 뙤약볕 아래 독한 향기의 유도화 분홍빛 울음을 토하고 있다.  그렇게나마 귀향을 꿈꾸는 최후의 안식처마저 점차 좁혀오는 아파트 단지의 따가운 눈총 아래  성한 이들..

어머니, 그 호칭 외 1편/ 김상현

어머니, 그 호칭 외 1편      김상현    어머니 돌아가시고  어머니란 말에 슬픔이 머문 것은   어머니라 부를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   더 한 슬픔은 이제 아무도  부를 이름이 없다는 것   육십 넘은 응석받이가 실없이 부르던 그 호칭,  신열이 날 때 절로 나오던 그 호칭   어머니 돌아가시고  어머니란 말을 잃는 건   불러야 할 온 세상의 이름을 잃는 것.     -전문(p. 64)       --------------------------------------------------    인체에 관한 기계공학적 접근   가능한 싱싱하고 말랑말랑한 것들을 연료로 쓴다. 입구에 있는 1차 파쇄기를 지나면 아래로 곧게 난 직선의 튜브를 통과해 2차 정밀분쇄기로 들어간다. 연료가 들어오면 ..

무욕(無慾)_강물사색 1/ 김상현

무욕無慾        강물사색 1      김상현    강물에 비친  꽃  내 것 아니고   강물에 넘어진  산  내 것 아니고   오직  내 것은  살 비비며 같이 흘러가는  그대뿐.    -전문-   해설> 한 문장: 존재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그 실존이 전개되며 생성된다. 이때 "존재의 요인은 흘러가 버리는 것이며 열린 사건"(미하일 바흐친 1895-1975, 80세, 러시아 사상가)이다. '나'가 강물에 잠길 때 '나'와 '강물'은 둘 다 변한다. '나'는 강물에 잠긴 '나'가 되고, 강물 역시 '나'가 잠긴 강물이 된다. 이 사건의 흐름에서 '나'가 강물에 잠기기 직전에 '나'와 '강물'의 변하지 않는 측면과 또 강물에 잠기는 순간에 변하는 측면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 상태로 주어진다. 이러한 여건..

그대가 있기에 외 7편/ 김찬옥

그대가 있기에 외 7편     김찬옥   당당한 그대의 벽에  크레파스로 희로애락을 그렸기에  나는 뒤늦게나마 시인이 될 수 있었고  때로는 수렁에도 시를 모종할 수 있었고  제 인생의 반은 푸르를 수 있었습니다     -전문(p. 사진 22/ 시 23)      ---------    삼 대   벽과 벽이 달리는 파도에 올라탔다  숨어있는 경계가 파도보다 많이 부서졌다  발밑에서 물살이 휘어질 때  암벽 같은 딱딱한 부성도 부드러워졌다     -전문(p. 사진642/ 시 65)        -------------------    그래서, 꽃   사람은 이웃에 비수를 꽂아도    꽃은 그 비수를 딛고 넘어와   따뜻하고 향기로운 손 내민다     -전문(p. 사진 66/ 시 67)      ------..

적벽강/ 김찬옥

적벽강     김찬옥    고향 집에 혼자 남은  어머니의 눈은 늘 수평선에 걸려있었다   거친 파도에 깎여 뼈만 앙상하게 남은 적벽처럼  켜켜이 살집을 내어 준 자리에 갖가지 무늬를 새기고  오늘도 굽이쳐 오는 물살을 낸발로 마중 나오셨다      -전문-   시인의 산문> 中: 자연은 내가 길을 잃고 헤매일 때 등불이 되어 주었다. 폐경기에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다. 평상시에 좋아하던 일들도 하나같이 다 재미가 없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반문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스스로 처방을 내릴 수 있었다. 병원 가는 일을 접고 산책 속에 빠져 점자 같은 나를 읽어내기로 했다. 산행하다 보니 죽어있는 나를 깨울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무와 꽃들과 작은 풀꽃들까지도 다시 태어난 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