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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밝은_미루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집(부분)/ 내 안의 절집 : 홍신선

내 안의 절집      홍신선    이 가을 찬비에 온몸 쫄딱 젖은 늙은 고양이가  절집 처마 끝에 은신해 그 비를 긋고 있다.   명부전 뒤 으늑한 땅이 생판 모를  한 포기 민들레를 가부좌 튼 무릎 위에 앉히고  서로 체온을 나누며 서로의 온기로 시간을 말리며  화엄 하나 이룬 것을  또 그 옆에는 고목이 고색창연한 제 슬하를 비워  담쟁이덩굴 두어 가닥 거둬 양육하는 것을   내 안의 어딘가 그런 절집 하나 찬바람머리 부슬비 속 그런 그린 듯 앉았다.  이건 내 세월도 아닌데 적막을 착취하는 이 비는 언제 그칠 것인가  속울음 삼킨 고양이마냥.     -전문-   ▶미루나무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집/ 홍신선 시인의 '오류헌五柳軒' (부분)_김밝은/ 시인  대문 앞에 '운보 문학의 집'이라 새겨진 표..

나무들 · 8/ 서녘/ 면류관(시 3편)/ 김남조

나무들 · 8/ 서녘/ 면류관(시 3편)     김남조(1927-2023, 96세)    바람 부스러기로  가랑잎들 가랑잎나비로 바람 불어 갔으니  겨울나무는 이제  뿌리의 힘으로만 산다   흙과 얼음이 절반씩인  캄캄한 땅속에서  비밀스럽게 조제한 양분과 근력을  쉼 없는 펌프질로  스스로의 정수리까지  밀어올려야 한다   백설로 목욕, 얼음 옷 익숙해지기,  추운 교실에서 철학책 읽기,  모든 사람과 모든 동식물의 추위를 묵념하며  삼동내내  광야의 기도사로 곧게 서 있기   겨울나무들아  새 봄 되어 초록 잎새 환생하는  어질어질 환한 그 잔칫상 아니어도  그대 퍽은  잘생긴 사람만 같다   - 전문 p. 87/ (출처, 제17시집 『심장이 아프다』)      ---------    서녘    사람..

편지/ 아가(雅歌) · 2/ 너를 위하여(시 3편)/ 김남조

편지/ 아가雅歌/ 너를 위하여(시 3편)      김남조(1927-2023, 96세)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한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바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전문 p. 48/ (출처, 제7시집 『설일』)       ------------    아가雅歌 · 2     나,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가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

금호동 5/ _ 이별의 부호/ 박호은

금호동 5       이별의 부호     박호은    저 산 너머가 얼마나 좋으면  곱게 단장한 꽃노을  바람난 여자마냥 바삐도 넘어 가는가  내 엄마도 벽제 어느 산을 오르더니 소식이 없다  그 산 너머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초가을 오후 문득 찾아간 엄마의 뜨락  산국화, 쑥부쟁이, 구절초꽃들과 흐드러져  가을 햇살 등에 업고 반짝이고 있더라   그 은밀한 사생활을 목격하는 순간  유년의 저녁으로 소환되던 건조한 눈물   같이 놀던 친구들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골목길은 붉은 그늘에 지워졌다   속울음 덮고 누운 밤  마음에서 보내지 못한 엄마의 팔을 감고  새우처럼 잠이 들곤 했다   살아 있는 자가 갑이어서  반짝이는 풀꽃들을 모조리 뽑아버리는 효孝  뿌리에 묻어 나오는 익숙..

금호동 4/ _ 슬픔도 사치라서 외 2편/ 박호은

금호동 4         슬픔도 사치라서      박호은    공동묘지 산비탈에 말뚝 박으면 다 내 땅이었을 때  찬밥 늘린 국밥으로 가난을 밀고 가던 엄마는  거친 생을 다녀가는 마흔여섯의 마침표가 됐다   흑백의 시간이 그늘을 굴리며 간다  날빛보다 더 밝은 곳으로  어린 눈물 밟고 가던 날   풀어버린 손이 미웠다  잡아끄는 울음마저 놓아버린 고요  싸구려 삼베 적삼 두루 말고 비탈 비탈 내려갔다   세상 인연 십삼 년  당신이 가엽다는 첫 생각, 철부지 그 정情이  닥나무 끈처럼 길고 질기다는 걸 그때는 알았을까   뒤돌아보는 눈빛이 있어 마주쳤는지 아닌지  그 마음을 읽어 낼 수 없는  작은 아이도 늙고  기록을 다 훑어도 없는 함시남 그 이름이  내 살 속에 진언처럼 박혀있다   다 타버린 들..

김밝은_말이 없는 산처럼 고요롭게 평화롭게(부분)/ 바위 하나 안고 : 오세영

바위 하나 안고      오세영    홀로 어찌 사느냐고요.  바위 하나 안고 삽니다.  집도 절도 아닌, 하늘도 땅도 아닌······  고갯마루 저 푸른 당솔 밑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바위 하나 안고 삽니다.  바위가 그의 품에 한 그루의 난을 기르듯  말씀 하나 기르고  바위가 그의 가슴에 금을 새기듯  이름 하나 새기고  바위 하나 안고 물소리를 듣습니다.  집도 절도 아닌  미륵도 부처도 아닌······       -전문, 『77편, 그 사랑의 시』 (황금, 2023)    ▶ 말이 없는 산처럼 고요롭고 평화롭게/ 오세영 시인의 '농산재聾山齋' (부분)_김밝은/ 시인  선생님 댁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이 넘게 달려서야 닿는 안성시 금광면. 아직 봄이라고 불러야 할 5월인데도 일찍 찾아온 무더..

푸른 바위 외 1편/ 이관묵

푸른 바위 외 1편     이관묵    바위 혼자 익는 저녁 옆에  바위로부터 슬며시  뺨을 얻어  등을 얻어  마음 개 놓고 고쳐 앉는다  바위의 일원으로   귀는 물소리에게 떼주고  눈은 구름에게 퍼주고   내가 바위로 익어  바위가 나로 익어   아무도 모르는 저녁이 왔다     -전문(p. 59)      --------------    서향집    외양간의 누런 소가  자신을 내일 읍내장에 판다는 사립문의 몸 비트는 소릴 듣고  밤새 잠 안 자고 뒤척이는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새벽녘 오줌 누러 나왔다가 소 얼굴 쓰다듬어 주고,  한참이나 목을 꼬오옥 안아주던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중절모 쓴 소 장수 손에 끌려가던 소가  되돌아 허공에 큰 울음 띄우던   그런..

흰 발자국/ 이관묵

흰 발자국      이관묵    눈 쌓인 숲길을 걸었네  한 마리 새 발자국을 따라 걸었네  벌판 둘러메고 한없이 혼자 걸어간   흰 발자국   이별의 간격이었네  그 속도였네  한 곳에 이르러 한참을 머뭇거리다 사라진  되돌아 나간 흔적 없는   하얀 영혼   어디쯤일까  나를 오래 세워놓은 여기는      -전문-   해설> 한 문장: 지금 이곳은 여름, 열기의 감옥. 열파 속에서 읽는 겨울의 시. 눈雪이 점령한 백색 공간에서 여름의 백백白白한 햇빛 아래로 건너온다. 상상의 선을 타고 움직인다. 바다가 '나'의 몸에 상감象嵌한 흰 발자국. 그 물빛과 하늘빛 사이에 낀 구름. 몰려오는 바람과 파도의 발톱을 바라보면서 떠올린 것은 절망. '나'를 맑게 하는 눈물을 본 듯하다. 이별만큼 쉬운 것이 없다. ..

법문사/ 지주혜

2024. 7. 26./ 금) 인천→ 서안→ 법문사     지주혜/ 동국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티베트-실크로드 돈황 인문학 기행의 첫날 일정은 서안에 도착 후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법문사에서 시작되었다. 법문사는 후한(後漢 147~189, 42년간)의 환제桓帝 · 영제靈帝 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본래 이름은 아육왕사(阿育王寺, 아쇼카왕사)였다. 형제 99명을 살육하고 왕위에 오른 아쇼카는 뒤늦게 이를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한다. 제3차 결집을 후원하는 한편 포교를 위해 부처님이 남긴 사리를 나라 안팎으로 보낸다. 이때 석리방釋利房 등 18명의 스님들은 진신사리 19과를 가지고 험난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으로 향했다. 목숨을 건 여정 끝에 중국에 도착했지만 불법이 꽃필 수 있는 여건은 무르익지 않아..

한 줄 노트 2024.10.31

그해 오늘/ 고영민

그해 오늘     고영민    오랜만에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체한 듯 속이 더부룩하다고 하여  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사 먹이고  도산공원을 걸었다  그해 오늘 저녁 그녀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다   그해 오늘  나는 또 그녀를 만나 점심을 먹고  커피를 손에 들고 도산공원을 걷는다  팔을 벌려 오늘의 냄새를 껴안는다   납골당에 다녀온 조카가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1주기야,  크고 뚱뚱한 엄마가  어떻게 저 작은 항아리 속에 들어간 걸까 ㅎ   동의 없이 무언가를 빼앗긴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해 오늘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다  갈라파고스 땅거북의 마지막 개체인  '외로운 조지(Lonesome George)'가 죽었고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수영으로  대한해협을 건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