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전철희_불안정한 세계 속의 사랑(발췌)/ 육짓것 : 죄금진

검지 정숙자 2024. 8. 13. 20:31

 

    육짓것

 

     죄금진

 

 

  제주에 이주한다는 건 마지막 버스를 놓치는 기분이지요

  스스로를 용서하는 느낌

  여기선 그 이주민들을 '육짓것'이라 불러요

  떠돌이 버릇은 끝내 못 고친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집으로 가는 마을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자꾸 본전이 생각나서 노름판을 서성이는 느낌

  견딜 수 없다면 다시 육지로 돌아가요

  여기서도 직업은 있어야 하고

  살림을 살아야 하고, 인맥도 만들어야 하고

  불 꺼진 방에서 혼자 늙어갈 노후도 걱정해야죠

  바다만 쳐다보고 있어도 될 줄 알았죠

  오름의 억새꽃처럼 바람을 이기는 지혜라도 생길 줄 알았죠

  육지에선 제주가 좋았고, 제주에선 육지가 그리웠지만

  그런 말은 패배 같아서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고요

  나침반 같은 거, 이정표 같은 거 필요 없지만

  쫄딱 망해서 흘러온 자신을 믿어야 하는 일은 늘 두려웠어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집도 절도 없이 나이만 먹은 것 같은 마음 아시는지

  날이 맑으면 여기서도 육지가 보인다 하니

  어쩌면 내가 떠나온 곳에서도 내가 보일지도 몰라요

  이제 거기서 잘 살라고, 손 흔들며 인사해줄지도 몰라요

  한라산에서 발견되었다는 미기록종 나비처럼

  헤어지고 떠나온 그대 꿈속에 가끔 날아가 볼 수 있다면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는 그만 포기하고

  이제 한번 걸어가 보기로 할까요

  한 바퀴만 돌면 목적지니까 다시 길 잃지 않을 거라는 믿음

  해안선이 길게 이어진 길에서

  충청도 어디가 고향이라는 뜨내기 육짓것 하나

  저무는 길 쪽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전문, (『문학의 오늘』, 2023-봄호)

 

 불안정한 세계 속의 사랑(발췌)_전철희/ 문학평론가

  논조로 보건대 이 시의 화자는 어떤 불가피한 이유로 '육지'를 떠난 것 같다. 제주도를 가야만 했던 사연은 무엇이 있을까. 작품만 봐서는 섣불리 단정하기 힘들다. 우리는 도시인의 삶이 어떤지를 대충 알고 있고, 제주도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육짓것'들의 처지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 세계의 인식망을 벗어난 방외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조금 시의 다음 부분으로 가면 화자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인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인지, 예전에 있던 사람과의 사랑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방외자가 자신의 가슴에 '사랑'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면, 그의 가슴 속에 형언불가능한 감정의 잔여물이 남아있다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시의 주제인즉 세계의 질서에 기입되지 못한 방외자에게도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것까지이기 때문이다. 

  이 시편은 여러모로 최금진의 문학적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익히 알려져 있듯 그는 밑바닥에서 추레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면서도 '사랑'에 대한 염원으로 시를 끝맺곤 하는, 낭만주의자이자 리얼리스트였다. 가난한 사람의 삶을 그려내고 사랑을 표현한다는 설명은 사실 1970~80년대에 활동한 많은 '민중시'의 작가들(신경림, 이성부, 정호승, 곽재구, 안도현 등)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다만 이 선배 시인들이 대체로 '지식인'의 입장에서 따뜻한 시각으로 '민중'을 바라본 반면, 최금진은 자전적인 경험을 풀어낼 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최금진의 시는 방외자의 삶을 따뜻하게 그려낸다기보다는, 차라리 위약적 자기혐오의 말투로 일관하곤 했다. 그런데 그 자기혐오조차도 유머러스하게 사회적 구조에 대한 풍자를 겸한 것이었기 때문에 유쾌하고 건강한 아픔이 있었다..

  그런데 최금진의 시가 지닌 중요한 특징은, 자기혐오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추레한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면서도 최종적으로는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의 시가 너무나 강한 자기풍자를 동반하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이물감을 독자에게 선사했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방외자조차도 '사랑'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하게 암시하는 장치로도 볼 여지가 있다. (p. 시 257-258/ 론 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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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딩아돌하』 2023-여름(67)호 <시계간평>에서

  * 최금진/ 2001년 『창작과비평』 제1회 신인 시인상, 시집 『새들의 역사』 외 

  * 전철희/ 광주 출생, 2010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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