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도깨비/ 박순원

검지 정숙자 2024. 8. 12. 20:52

 

    도깨비

 

    박순원

 

 

  나는 얌전하게 나의 차례를 기다린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월화수목금토일

  한놈 두시기 석삼 너구리 오징어 육개장

 

  부지깽이나 몽당빗자루 같은 것들도 쓰다가 아무 데나 버리면 저 혼자 도깨비가 된다 (최명희, 『혼불』 중에서) 

 

  나는 얌전하게 나의 차례를 기다린다 주민센터에서 병원 외래진료 대기실에서 은행에서 우체국에서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린다 화면을 터치해서 음식을 주문하고 순서를 기다린다 387번 고객 27번 고객 515호번 고객 10273번 고객 삼백칠십오만팔천육백오십사번 고객 기다리다 기다리다 보면 순서가 온다 내 순서 내 차례

 

  나는 대체 가능한 자원이다 대체 가능한 소비자가 대체 가능한 고객이다 부지깽이 빗자루 지게작대기 바가지 행주 걸레 여물통 맷돌 절구 재봉틀 다 저마다 쓸모가 있겠지만 자원을 관리하는 차원에서는 소비자 고객을 관리하는 차원에서는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고

 

  스스로 도깨비가 되어 심술을 부려보지만

 

  도깨비는 도깨비들끼리 스머프는 스머프들끼리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은 귀신들끼리 다 순서가 차례가 있을 것이다 부지깽이처럼 빗자루처럼

    -전문(p. 14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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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딩아돌하』 2023-여름(67)호 <신작시>에서

  * 박순원/ 충북 청주 출생, 2005년『서정시학』 겨울호 신인상, 시집『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주먹이 운다』『그런데, 그런데』『에르고스테롤』『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