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김언_아무도 떠나지 않았으나 모두가···(발췌)/ 못이 자라는 숲 : 신동옥

검지 정숙자 2024. 7. 31. 15:41

 

    못이 자라는 숲

 

    신동옥

 

 

  낫과 부삽을 들고

  정원에서 시를 썼지 백일홍과 덩굴장미가 뒤엉키고

  라일락 향을 품은 사과가 쏟아졌다

  웃자란 꽃 덤불에 누웠지만 향기에는 라임이 없어서

  벌 나비는 깜빡이는 커서를 선회하고

  구겨버린 종이 같은 하늘이 손끝에 휘감겨 왔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 속으로 난 푸른 길을 따라

  떠나는 사람을 쫓아서 길을 나섰다

 

  그다음 거리의 시를 썼어 애초에

  다듬어 놓은 정원이 오래갈 거라 믿지는 않았다

  비가 그친 틈에 화분을 파헤쳐 보면

  망가진 장난감과 깨진 술병투성이였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헤매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꿈속이었다

  거리의 끝에는 광장이 펼쳐졌고 거기서는

  저마다 자기 플롯을 이끌고 온 사람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시라고 불러온 노래를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정원에서도 거리에서도

  나는 늘 반쯤 죽은 채로 노래했다 한동안은

  지하 세계에 스스로 유폐하고 시를 이어갔다

  창을 열면 담벼락이 보이고 볕을 쪼이며

  늘어선 프로판가스통 위를 날아다니는 고양이

  언젠가는 꽃에 대한 믿음 하나로 이파리를 세어갔지만

  남은 것은 잎자루 꽃대였다 다정하고 아름다운 길동무들은

  뿔뿔이 자기 침대로 돌아간 지 오래였으므로

  삶이 비대해지기 전에 뒤돌아보련다 다짐하지만

  선택지가 불어날수록 선구안은 폐색되어갔다

  고양이들은 거짓말처럼 아늑한 모퉁이를 찾아내는데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쪼이는 구석은

  요람 아니면 무덤이었다

  어느 사이 나는 묘석 사이로 난 포도를 걸으며

  노래를 이어갔다 여름에 부르는 봄노래 가을에 부르는

  여름 노래처럼 어느 계절에는

  거짓말처럼 큰 눈이 퍼부어서 가지가 찢어지는 굉음 속에서

  흙먼지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표정으로

  사랑을 노래했다 결국

  노래하는 자는 순교자였다

 

  작고 영롱한 기억마저

  말소한 다음에야 사랑 노래는 시작되었으므로

  내가 지하 서재에 엎드려 있을 때 어딘가

  불이 켜져 있었다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바닥에

  바닥으로 내려가 깨진 묘석을 껴안고 뒹굴고 있을 때조차

  해는 지고 별은 비추었다 모든 것은 제 빛으로 다가왔지만

  내 몫의 노래는 없었다 광장을 지나 길 끝에 이르면

  낡은 문고리가 매달린 대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문밖에서 나는 언젠가 당신이 돌아서는 발소리를 들었지만

  해피엔드는 다른 정원에서 꽃핀다

      -전문-

 

  아무도 떠나지 않았으나 모두가 돌아오는 길(발췌)_김언/ 시인

  '요람'과 '무덤'이라는 양극단을 사이에 두고 발견되는 길이 설령 죽음의 길로 귀착하더라도, 화자는 거기서 다시 "묘석 사이로 난 포도를 걸으며/ 노래를 이어"간다. 둘 중에 어느 한쪽 길만 남게 되더라도, 그 길은 다시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만들며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노래란 것이 한 발짝 늦게 도착하는 노래라는 점이 흥미롭다. "여름에 부르는 봄노래"나 "가을에 부르는/ 여름 노래처럼" 철 지난 노래가 되는 이유가 뭘까? 어쩌면 "작고 영롱한 기억마저/ 말소한 다음에야" 시작되는 "사랑 노래"(「못이 자라는 숲」)이기 때문은 아닐까? (p. 시 148-150/ 론 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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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4-2월(410)호 <현대시작품상 본심 추천작 3_을 읽고> 에서 

  * 신동옥/ 시인, 2001년『시와반시』로 등단

  * 김언/ 시인,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숨 쉬는 무덤』『거인』『소설을 쓰자』『모두가 움직인다』『한 문장』『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백지에게』, 산문집『누구나 가슴에 문장이 있다』, 시론집『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