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렌식 금지령
윤정구
얼음장 풀리는 봄강에서
지난겨울 말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모두 놀랐다
(이놈 보아라, 이제는 뻔한 거짓말도 하고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죽이고 가세."
"아니, 아직 창창한 나이인데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나?
한때는 우리와 함께 공부한 친구가 아닌가?"
뚜렷이 들리는 소리에 기가 막혔네
그 친구가 없어진 것이 놈들의 짓이던가
옳거니, 이제 광희문 느티나무에게서 600년을 복원할 수 있으리
그 후로는 돌돌돌돌 흐르는 물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늙은 고목나무에 귀 기울여 본다네
그 느티나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네
포렌식만 할 수 있다면 단박에 비밀을 알 수 있지
천지신명은 서둘러 포렌식 금지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네
-전문(p. 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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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23-겨울(94)호 <신작시> 에서
* 윤정구/ 1994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한 뼘이라는 적멸』외, 시선집『봄 여름 가을 겨울, 일편단심』, 산문집『한국 현대 시인을 찾아서』, <시천지> <현대향가시회>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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