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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원탁희

부고     원탁희    어젯밤 잠을 설쳤다  상여 나가는 꿈속  상두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빠져  어허 어허이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그런데 친구가 상여 위에서 앉아 손을 흔들면서 웃고 있었다  왜 네가 거기 앉아 있으며 어디 가느냐고 묻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고 으으으 하다가 잠이 깨었다  이른 아침 날아온 문자  어젯밤 그 친구의 부고였다  어 참 허 참  어허 허 참  찬물을 한 잔 들이켜고서야 정신을 차린다.     -전문(p. 149)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원탁희/ 1996년『시와시인』으로 등단, 시집『세상살이』

붓꽃 피다/ 신덕룡

붓꽃 피다      신덕룡    이름값을 하느라 저렇듯 망설였구나    새로 꺼내든 붓끝에  먹물부터 잔뜩 머금었지만   바람결에 잎새들 뒤척일 때마다 마음이 바뀌고 흔들리는지 한 글자 쓰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걸 모를까 멀리서 날아온 나비 한 마리 잠시 머물다 간 뒤   글썽이는, 필설로는 다 하지 못할 그리움이 더 아득해졌는지 붓을 놓아버렸다 팔을 쭉 뻗어 먹물로 얼룩진 손바닥을 펴고 흔들어댄다   눈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어 놓았다   잠깐의 머뭇거림 하나 없이 부끄러움도 없이     -전문(p. 144)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신덕룡/ 1985년『현대문학』으로 (평론 부문) & 2002년『시와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소리의 감옥』..

사막의 여우/ 권선옥

사막의 여우      권선옥    바하리야사막 한복판  뜨거운 모래밭  군데군데 풍화하는 푸시시한 돌덩이,  비람에 날아온 풀씨도  싹 트지 않는 허허벌판.  먹을 것을 찾아  느릿느릿 돌덩이 사이를 기웃대는,  어린 여우를 만났다.  발바닥에 불이 나는  저 막막한 모래벌판에는  입술을 적실 물 한 모금조차  없다.  생명은 독하게 야속하고 모진 것,  저 아이도 무사히 자라 어미가 되고  그 어미처럼 새끼를 낳게 해 달라고  나는 그저, 하나님, 하나님  연거푸 하나님을 불렀다.      -전문(p. 121)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권선옥/ 1976년 『현대시학』추천 완료, 시집『감옥의 자유』『허물을 벗다』『밥풀 하나』등, 시선집『별은 밤에 자..

오형엽_조병화 시의 역설적 의미 구조 연구(발췌)/ 너와 나는 : 조병화

너와 나는      조병화(1921-2003, 82세)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 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 버린 캘린더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랑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샹들리에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

곽효환_'오래된 책'과 '미래의 책' 사이에서(발췌)/ 오래된 책 : 곽효환

오래된 책      곽효환    하늘 가득 펑펑 쏟아진 눈 쌓이고 동장군이  동네 꼬마들의 바깥줄입을 꽁꽁 묶은 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감자며 고구마를 삶고  누이와 나와 사촌들은  구들방 아랫목에 깐 이불에 발을 묻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릴 적 약을 잘못 먹은 탓에  길눈이 어둡고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어느새 마을 최고의 흉내쟁이이자 이야기꾼이 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밤 깊어도 마를 줄 모르고  아이들은 졸린 눈을 부비며 귀를 세우다가  하얀 눈을 소리도 자국도 없이 밟으며 온다는  눈 귀신에 진저리 치곤 했다   다음 날이면 나는  말 한마디 토씨 하나 숨소리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외워서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 서사 그 느낌 그 흥분을  에워싼 동리 아이들 앞에서 ..

저물면서 빛나는 사람들/ 곽효환

저물면서 빛나는 사람들      곽효환    작열하는 햇빛과 찌는 듯한 무더위가 깊어  꽃들도 풀들도 지쳐 고개를 떨구는  기울고 시들해지는 저무는 시간 비로소  단단한 중심이 되어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더 화려하게 피는 능소화 같은   더 그윽하고 강인하게 피는 무궁화 같은  여름 내내 피고 또 피는 백일홍 같은 사람들   1.  책과 거문고, 꽃과 그림 그리고  술과 도연명을 사랑하여  맑은 시냇가에 집을 지은 유학자의 후손*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고자 하였다  의병운동에 뛰어들었고  학교를 세워 구국 계몽운동에 헌신했으나  끝내 나라가 망하자  지천명이 훌쩍 넘은 나이에  가산을 정리하고 솔가해 두만강을 건넜다  무관학교를 세워 강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힘으로 맞서 나라를 찾고자  죽는 날까지..

바다의 착시(錯視)/ 윤명규

바다의 착시錯視      윤명규    무슨 일로 햇살은 조각조각 깨어졌나  수평선에 부유하는 태양의 살점들  포충망 휘저으며 바람은 달려오고   아직 잡을 그 무엇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황금 깃털  그물코를 빠져나간다   주저앉고 싶기도 했을 텐데    꺼지지 않는 욕망의 무게가  도대체 얼마였길래  몸뚱이 깎이는 줄 모르고 있을까   추락해 익사한 하늘이  그보다 더 짙게 젖는 오늘     -전문(p. 40) ---------------*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6. 5.펴냄  * 윤명규/ 202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허물의 온기』『흙의 메일』

장군섬 근처/ 문화빈

장군 섬 근처     문화빈    마을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장군섬 근처까지 가서 주낙을 폈다   왕창 잡으면  청소기도 사 주고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도 보내주고   파도 더미가 편측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선체는 주낙의 방향과는 전혀 딴 데로 튕겨져 나간다   멀리 갈치밭에  수십 척 떠 있는 주낙배의 어화 불빛이  나를 안쓰러워한다   바다가 말을 듣지 않는다  바다가 나를 거부하고 있다     -전문(p. 35)   ---------------* 군산시인포럼 제4집 『바다의 메일』 에서/ 2024. 6. 5. 펴냄  * 문화빈/ 202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파이(π) 3.141592...』

박상태_동화와 투사 그리고 이미지/ 사슴 : 노천명

사슴      노천명(1911-1957, 46세)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전문-   ▶동화와 투사 그리고 이미지(부분)_박상태  서정시는 개인의 희로애락의 감정 가운데서도 정제된 것을 풀어내는 형식이다. 또한 서정시의 장르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시 정신 또는 시적 비전이 시인 자신의 세계관과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 캘더우드(James Caldewood)라는 문학 이론가에 따르면 시인이 의식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방법은 동화(assimilat..

반사경/ 오승연

中     반사경      오승연    주차장 입구 측백나무 가지에 반사경이 걸려 있다  누가 저렇게 아름다운 눈동자를 만들었을까  측백나무 초록이 한껏 떠받들고 있다   다가오는 것들마다 누르고 자르고 찌그러뜨리는  저 반사경은 유머를 아는 종족 같은데   오늘은 아랫집 새댁의 부른 배를 내 자동차 유리창으로 밀어 넣는다    언제 눈을 깜빡이는지 본 적은 없지만  더러는 저 눈빛을 피해 지나간 사연들도 있을 테지만   사람도 자동차도 한 번 눈에 들면  왜곡된 시선이 진실이 되는지  어쩌다 충혈된 눈으로 이마를 찌푸리기는 한다   핏빛 노을 없이도 뜨거운 눈빛으로  산목숨에 제 목숨을 내걸고 있는 반사경 얘기일까   우리 동네에는   측백나무에 눈이 달려있다는 소문이 있다     -전문(p.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