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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정겸

유월     정겸    5월과 7월 사이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두가 닫혀있다  푸른 장막에 가려진 비밀 정원 같은 계절   주목나무 산길을 따라  비자나무 숲길을 따라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따라  되돌아보니 참으로 멀리도 왔다   공원 모퉁이 담장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언제나 제 자리 지키는 능소화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아무 일 없는 듯 주황색 얼굴 화사하다   걸어오는 동안  나와 당신의 간격은 유월처럼 어설프다  메타세콰이아 즐비한 공원을 함께 걸었던 시간들  붉은 꽃이 언제 피었는지 기억 아득하다  이제는 나무도 시간도 늙어 시들어버렸다   덩굴 장미꽃잎이 하롱하롱 마른땅 위로 떨어지는  봄도 여름도 아닌 애매한 유월     -전문(p. 178-179)  ------------------..

상생/ 박현솔

상생     박현솔    농촌 체험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나이 든 선생님들이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고  도시에서 온 아이들이 땅을 일구고  돌을 가려내서 지지대를 세우고  모종을 심고 흙을 덮은 후 물을 주는  모든 과정들이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아이들은 흙의 비밀을 더 알고 싶은지  집중해서 듣고 또 만져보기도 한다  그때 갑자기 한 선생님이 징을 세게 두드리며  선창을 하고 아이들이 입을 모아 함께 외친다  벌레들아, 약을 뿌릴 거니까 얼른 피해라  벌레들아, 약을 뿌릴 거니까 얼른 피해라  시간이 없으니까 그만 앞에서 내려와라  징 소리와 함성이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동네 사람들과 개들이 함께 구경 나와서  그 순간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데  한가롭게 잎사귀에 붙어서 단물을 빨던  벌레들이 깜짝..

당신의 집을 다녀오며/ 이은봉

당신의 집을 다녀오며      이은봉    당신의 영혼은 하늘에서 살더라도  당신의 몸은 땅에서 살지요  당신의 영혼을 찾아 하늘까지 갈 수는 없어  당신의 몸이 사는 땅으로 갔지요  대청호 근처 산속  당신의 집을 찾아간 것이지요  늦가을이라선지 당신의 둥그런 풀집은  바짝 말라 있더군요 여기저기  멧돼지들의 발자국들이  거칠게 남아 있기도 하고요  멧돼지가 긴 주둥이로 마구 땅을 헤집어  당신의 집 정원에도  몇 군데 파인 곳이 있더군요  새로 자란 담배나물과 산쑥이  삐쭉삐쭉 머리통을 디밀고 있기도 하고요  당신의 둥그런 풀집부터  서둘러 정리했지요 문을 열고  당신이 계신 곳까지 갈 수는 없지만요  낫과 괭이를 들고  당신의 집 정원을 다듬느라고  쩔쩔맸어요 두 번 엎드려 절하고  잘 다듬어진 당..

하우하필(夏雨下筆) 1/ 김송배

하우하필夏雨下筆 1      김송배    비가 내릴 듯 말 듯  그대는 찌푸린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이내 침묵으로 흙 가까이 낮게 엎드린다  오늘도 열매가 여물 듯 말 듯  한 웅큼 햇살이 그대 가슴을 핥아야  의미 있는 이별을 준비하겠지만  어찌된 일이냐 그대여  속살까지 적시는 우기雨期의 언어는 무섭다  마른 하늘이 울고  다시 숨 가쁘게 훔쳐내는 그대의 눈물  알토란 둥근 잎으로 그냥 가려보는  치유될 수 없는 우리들 아픔이지만  비가 내릴 듯, 열매가 여물 듯  저리도 울어 쌓는 매미들  그대가 낮게 엎드린 이쯤에서  사랑이 되지 못한 젖은 화음으로  오늘 일기예보 또한 예사롭지 않다.     -전문( p. 134)   ---------------------- * 『한국시학』 2024  여름(7..

물의 표정/ 이향아

수상작     물의 표정      이향아    누구는 물의 표정을 고요라고 쓰고  어떤 이는 그래도 정결이라 하지만  나는 또 하나 순종이라고 우긴다  거슬러 흐르는 걸 본 적이 없으므로  앞 물을 따라가며 제 몸을 씻는 물  영원의 길을 찾아 되짚어 오는 물  돌아오기 위해서 불길 위에 눕는 물  물의 온도는 봉헌과 헌신  이슬로 안개로 그러다가 강물로  온몸을 흔들어 겸허히 고이는  물의 내일은 부활  조용한 낙하   -전문, 시집 『모감주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2024, 시와시학, p_40)   * 심사위원: 이근배(시인, 공초 숭모회 회장), 문정희(시인, 제31회 공초문학상 수상자),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교수)    ------------------------------------..

빨래들의 합창/ 윤고방

빨래들의 합창      윤고방    살아생전 그녀가 가르쳐 준 대로 세탁기를 돌린다   어설프게 더듬더듬 버튼을 누르면 무거운 회전통이 뒤뚱뒤뚱 돌아가는 사이 지나간 세월도 씽씽 살아나고 원심력에 이끌려 그대 익숙한 솜씨로 돌려대던 생글생글한 삶의 시간들이 줄줄이 엮여 올라온다   구정물에 젖어 축 처진 바지저고리는 습관성 토악질이 한창이다   눈물 콧물 젖은 손수건 길바닥 먼지 부시래기 온갖 잡동사니들이 서로 부딪쳐 아우성치고, 백동전 서너 잎 꼬불쳐 두었던 지폐 두어 장의 마지막 자존심, 주머니 깊은 밑바닥에 고집스럽게 가라앉아 있던 나사못 몇 개, 쇠 쪼가리들이 무대 가운데로 살금살금 기어 나와 사방 눈치를 살핀다   세탁기 안에서는 헛구역질인지 늘상 꾸르륵 소리가 흘러나왔다   쉰내 구린내 나는 ..

무지개/ 강상기

무지개      강상기    캐나다에 살고 있는 딸아이가  얼마 전에 카톡에 벤쿠버 하늘의  쌍무지개를 보내왔다  딸아이 마음속에  무지개가 항상 걸려 있었나 보다   여름날 오후 비 개인 뒤  집 마당에서 여섯 살 딸아이와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아빠, 저 무지개 여기 꽃밭에 심자  순간, 꽃밭은 무지개로 변했다   지상에 내려온 무지개 꽃밭에 서서  딸아이와 나는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았으나  무지개는 우리 마음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붙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좇아  지금껏 가슴 두근거리며 살아왔다     -전문(p. 113)   ---------------------- * 『한국시학』 2024  여름(70)호 에서 * 강상기/ 1946년 전북 임실 출생, 1966년 월간종합지 『세대』 & ..

함소입지(含笑入地) 외 1편/ 정두섭

함소입지含笑入地 외 1편      정두섭    젖 불기 기다리던 포대기 속 울음이  기다 걷다 발서슴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젖은 달 마르도록 손금 다 닳리도록   다랑논 어느새도  장돌림 어지간도  어쩌다 사기막도  어차피 갖바치도   다시금 애옥살림 게막에 돌아오지 않았다   거시기고 아무개라 사초마저 뭇풀인데  죽기야 하겠나, 죽기밖에 더 하겠나  한목숨 시위에 걸고 왜바람 가로질러   다시 보는  다시 봄에  김치 치즈 스마일   웃음보 터트리는 걸음나비 포인트로   돌아온  봄의 씨앗 무명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문(p. 90-91)      ----------------------    마릴린 목련    애지중지 호롱불은 멋 부리다 얼어 죽고  제멋대로 화톳불은 까무룩 새까매져서  할마..

우로보로스/ 정두섭

우로보로스      정두섭    병 속에는 쥐가 있고 뱀이 있고 뱀이 된 쥐는 없고 쥐를 삼킨 뱀만 있고 좁은 병 못 빠져나와 뱀은 쥐를 뱉고 뱉고   구겨진 몸 다리고 구겨질 몸 걸어놓고 옷걸이 물음표만 남기고 사라질 때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먼저 온 후회였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이 불온함을 위한 시적 장치로 사용하는 것은 골계滑稽이다. 알다시피 골계란 익살이나 우스꽝스러움, 농담과 유머 등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는 미적 범주의 하나로 숭고와 비장, 우아와 함께 예술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미적 가치라 할 수 있다. 일찌기 조동일은 자신의 문학 연구 방법론을 명시한 여러 저서를 통해 문학작품에는 있어야 할 당위와 있는 것으로서의 현실이 서로 융합하거나 상반함으로써 조화와 갈등의..

김남호_꽃, 몰라서 아름다운 나의···(부분)/ 꽃 : 기형도 & 미스터리 : 김상미

꽃     기형도    내 영혼靈魂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 앓는 그대 정원庭園에서  그대의  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전문(p. 231)    ※ 『기형도 전집』, 새로 찾아낸 미발표 시(1999, 문학과지성사, p-169)    --------------    미스터리     김상미    모든 꽃은  피어날 땐 신을 닮고  지려 할 땐 인간을 닮는다   그 떄문에  꽃이 필 땐 황홀하고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     -전문(p. 231)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2022, 문학동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