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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_미래에서 올 '아름다운 영혼'의 빛살(발췌)/ 즐거운 편지 : 황동규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姿勢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落葉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전문, (첫 시집 『어떤 개인 날』, 中央文化史, 1961)   ▶미래에서 올 '아름다운 영혼'의 빛살(발췌) _..

축/ 장대성

中     축      장대성    우리는 아직이라고 말하네  서랍 안에 뭐가 있는지 몰라서   고양이가 튀어나올 리는 없어  슈뢰딩거는 피자집 알바생처럼  너무 많은 상자를 접고 닫고 열어 보면서도   자신에게로 뛰어드는 상상 속 고양이를  안아 줄 수조차 없었잖아   아무래도 미래일 거야  손잡이를 몸쪽으로 당기면  미래가 도래하듯 서랍 안의 어둠이  서서히 밝아질 테니까   그런 설정이라면 미래는  서랍이 아닌 우리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네  빛이 굴절하여 형상을 만들고  눈물이 볼을 타고 슬픔을 드러내듯   불을 끄고 누워 반짝이는 말들 속삭이던 밤은  우리를 넘어 방을 마음으로 만들었네   그걸 고양이라고 할까  아니 게라고 하자   꼬리를 세차게 흔들어도 괜찮을 만큼  튼튼한 몸을 가질 수 있도..

경첩/ 정우신

경첩   정우신    느지막이, 나비를 따라서 간다. 나비가 담장에 앉아 날개를 몇 번 부딪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내가 부채로 무심코 바람을 일으킬 때 누군가 우산을 버스에 두고 내리는 것. 바이올린이 끝나지 않았는데 박수가 터져 나오는 것.   커튼을 열었다가  젖히면  봄이 올 때도 있고  하늘을 보며   골목을 걸으면 하늘을 보는 사람과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분리수거를 먼저 하고 지난 달력을 넘길까. 물건을 정리하고 줄넘기를 할까. 요즘엔 심장에서 초침 소리가 들린다. 강아지 장난감 건전지를 바꿔 본다. 몇 번이나 짖어야 조용해질까.   인형에  눈빛이 돌아서  밤을 새우고  책상에 앉아  고무를 자르면   등이 열리고 나비 떼가 쏟아진다. 나는 공벌레를 좋아한다. 꿈이라기엔 장..

허튼소리/ 이서하

허튼소리      이서하    의외의 인간은  눈치 아닌 게 없다   나는 그의 무릎에 앉아 죽는 것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또는 어쩌다 지금까지 살다 보니 흐려지는 것이 있어 불가사의하다는 것과 일어나지 않은 일이 더러 있다는 말을 하나로 믿게 되었다 빈손은 부조화를 이루지만 조증 환자의 낯빛으로 저녁에 반항하는 겨울의 차고 흰 돌처럼 하나의 상태를 예외로 기다린다 이 행위가 김지될 때까지 인간이 그것을 가능하게 본다, 손에 쥔 게 마땅히 없음에도   ······ 잘한 것이 있다면   애써 부추기지 않은 것     -전문(p. 60)   ------------------  * 『계간파란』 2024-봄(32)호 에서  * 이서하/ 1999년 ⟪한국경제⟫ 신춘문예 당선, 시집『진짜 같은 마음』『조금 진..

하이랜더/ 변혜지

하이랜더      변혜지    이상하게도   이 나라에는 전설이 많아서 누군가 죽거나 누군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이상하지 않다. 나는 죽음을 믿는다.   분홍은 가루 분 자에 붉을 홍 자를 쓰네. 희재는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어떤 영혼은 제 몸을 덮은 꽃잎이 무거워서 승천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안내인은 지나치게 상냥한 손짓으로 나를 이끈다. 그의 정수리를 햇빛이 겨누고 있다. 끝이라는 게 있다면 여기 아닐까. 희재가 또 중얼거리고 있다.   사람들이 나의 몸을 마른 천으로 닦고 흰옷을 입혀준다. 생목으로 짠 관은 시간이 지나면 비틀림이 발생합니다. 뚜껑을 닫으며 안내인이 마지막으로 설명한다. 관 속에서는 살아 있던 나무의 냄새가 난다.   관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차례..

치열한 바다/ 김충래

치열한 바다     김충래    소리치며 파도는 달린다  닿았다 사라지는 거품 같은 내일  너를 붙잡기 위해 저 멀리에서  멍든 몸을 넘고 넘어 처절히 사무친다  고비마다 부서지고 깨지면서  다가서면 돌아보지 않고 늘 그만큼의 거리로 도망치는  끝나지 않는 전쟁  술래 같은 널 잡으려 달려들면  모래 속으로 모레로 가고  글피로 사라진다  가까이 있지만 결코 오지 않는 너  어제를 부정하며 오늘도 미친 듯 뛰지만  끝은 늘 허무에 찬 미지수   오기로 약속했지만  오지 않을 두터운 내일이라 해도  포기는 없다 파멸될지언정*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놓아 주는 것이고  지나가는 것이며  잊어버리기 위함이라고  애써 넘실대며 내일을 향해  오늘도 쉼 없이 짠 눈물에   쓸 말을 찾아 흐느낀다     -전문..

내 그리움은 늙지 않네/ 백무산

내 그리움은 늙지 않네      백무산    한두 집 떠나더니  잠시 아들네 집 다녀온다더니  수술하고 금방 돌아온다더니  딸네 집 가서 겨울나고 설 대목 안에 꼭 온다더니  어느새 마을 전체가 비었네   이 마을 실거주자는 묶인 개 한 마리와  감나무 까치집에 까치 두 마리  아랫마을에서 반장 집 사위 되는 이가  어쩌다 경운기 끌고 잠시 다녀가고  개밥 주러 온 승용차가 어쩌다 다녀가고   마당엔 털다 만 깻단들 바람에 흩어지고  어무이 아부지 땀 배인 집 나고 자란 마을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니까 다짐 두었지만  삶은 버겁고 기억도 낡고  텃밭에 열무 배추 갈아 놓았지만 잡초만 뒤덮고   시린 초겨울 하늘은 퉁퉁 부어 있고  주인이 오지 않아 장독들 풀 죽어 있고  뒷마당 대나무는 아궁이까지 뚫고..

남은 자의 의문/ 김조민

남은 자의 의문       김조민    여기가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발을 헛디딘 것일까요   의자가 있었습니다  나는 구부정한 등이었죠   저기 눈길에서 망설이고 있는 늙은 개처럼 땅 너머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작은 돌멩이 옆에 어른거리던 그림자 몇이 거대한 나무의 잎사귀였는지 아무도 모르게 피고 졌던 이름 모를 꽃이었는지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믿지 못하는 마음 한 귀퉁이가 빛에 바랬어요  쓸쓸한 나머지 부분이 마지막 힘을 냅니다  무엇이 본질이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지나 버린 빛을 쫓아 서둘러 담장에 오르기 전까지의 결심은 아주 쓸 만했어요   남은 것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뛰어내릴지 알 수 없게 된 이후 돌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해 사랑에 대..

연차휴가/ 유현아

연차휴가         되어진다고 믿는 것들      유현아    우리는 이렇게 살지 말자, 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그럼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지, 라고 주장하는 사람   앞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야근 뒤의 사람들은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떠밀려 가는 구름처럼  하루의 하루를 비워 둔 채로 산다고 말하지   (아버지는 사장을 꿈꿨다)   이 세상이 아름답게 되어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오후 네 시의 따분함처럼 적막을 기다리고  어깨와 어깨가 부딪히는 시간은  금방 사라지게 되어질 거라고  상자 안에 들어가서 군데군데 빈말을 뿌려 놓는다    (아버지는 망했다)   야근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제보다 많은  이유를 알고 싶지 않다  봄이 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겨울 코트를 ..

길을 찾아가는 바다/ 김차영

길을 찾아가는 바다      김차영    실개천에 태어나  강을 지나 바다로 나가 보았다   섬으로 가는 길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심해의 터널   바다가 환해질수록 쌓이는 어둠,   투잡, 쓰리잡을 해도 멀어지는 섬  성장하는 물고기 포기부터 배워  삼포, 오포, 칠포 세대로 이어지다  다포 세대가 되어가는 요지경 바닷속   그 속에서  남이 아닌 내가 되어  하찮은 조개껍질을 모으며  나만의 바닷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전문(p. 49) ---------------*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6. 5.펴냄  * 김차영/ 2021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미이라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