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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의 실재/ 한영미

마술의 실재      한영미    무대 한가운데 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그가 내부를 열고 빈 속을 관객에게 확인시킵니다 그런 다음 나를 지목해 그 안에 넣습니다 상자를 닫는 동안 한 번 더 객석을 돌아봅니다 몸을 구부려 넣는 사이 자물쇠가 잠깁니다 인사가 장내를 향해 경쾌하게 퍼집니다 시작은 언제나 이렇게 단순합니다 그가 긴 칼 꺼내 듭니다 구멍이 숭숭 사방으로 열려 있습니다 하나씩 칼이 꽂힙니다 정면이기도 측면이기도 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상자를 회전시키고 뒤집습니다 비밀 따윈 애초에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리가 잘리고 팔이 잘리고 마침내 소리 없는 비명이 잘려나갑니다 그가 동백을 생강꽃이라고, 씀바귀를 신냉이리고 주문을 욉니다 나는 생강꽃이 되어 생강   생각   바닥 두드리고, 씁쓸한..

바다 4_간월도/ 나채형

바다 4        간월도     나채형    얼굴 모양  이상 표정이 다르듯  물의 깊이 결이 다르고  소리 높이도 무두 달랐지만   심장을 담은  파도 소리의 느낌은 모두 같았어   사람이 만든 바닷길에  새들이 모여 살고   제비꽃 향기를 품고 있는  온기를 느낄 수 있었지   익어가는 표정들  바이올린처럼  내 곁에 값진 사람으로 남았으면···    -전문(p. 58)   ---------------*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6. 5.펴냄  * 나채형/ 2021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사막의 보트 타기』

연인들은 혁명을 잊는다/ 한분순

연인들은 혁명을 잊는다      한분순    나비의 휘파람이  우울을 관통하며,   신비와 포옹 나눠  기쁨에 초대한다   바람은 서정의 질감  투명한 연애 편지   별들을 포식한 뒤,  혁명 잊은 연인들   꽃들만 폭주하듯  반역처럼 으르렁대   립스틱, 미사일 닮아  통속을 구원한다     -전문(p. 92)   ---------------------- * 『월간문학』 2024-6월(664)호 에서 * 한분순/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꽃잎은, 잃어버린 길처럼/ 동시영

꽃잎은, 잃어버린 길처럼      동시영    시선엔 보이지 않는 문이 있다   적막이 푸른 숲,  소리는 고향처럼 침묵을 찾아가고  꽃잎은 잃어버린 길처럼 흩어진다  꽃들의 뒷모습이 활짝 핀다   그들의 고독은 진자振子처럼 왔다 갔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오고가는  '운동방정식'을 풀고 있다   바람은 조용하면 죽는다  습관으로 길을 낸다   누군가,  화가의 물감처럼  여름을 짜내  숲에 바른다   여름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전문(p. 59)   ---------------------- * 『월간문학』 2024-6월(664)호 에서 * 동시영/ 2003년『다층』으로 등단, 시집『미래 사냥』『낯선 신을 찾아서』『신이 걸어주는 전화』『십일월의 눈동자』『너였는가 나였는가 그리움인가』『비밀..

꿈속의 향연(饗宴)/ 송동균

꿈속의 향연饗宴      송동균    나는 첩첩 산중 깊숙하게 뚫린 숲길  온몸 소름 피는 긴장감으로 걷고 있었다   아무도 없이 나 홀로만의 외로운 길  조마조마 긴장된 숲길이지만  어쩌면 내 어릴 적 그리움 피어나는  고향길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내 나아가는 길 위에  한줄기 실오리 같은 햇살이 눈이 부시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이 기적의 햇살 거머잡았고  허공에 떠 올라 어느새  아스라이 높게 피어있는 꽃구름 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때맞추어 내 앞에 나타나신 우리 어머니,  어머닌 눈부시게 하얀 목화송이로 피어 계셨다   나의 애탄 그리움으로 피어나 계신 어머니,   그러나 더는 나에게 다가서지 않으신 채  날 향한 간절한 기도와 묵시 피워내고..

이옥진_삶에 대한 평생문안(발췌)/ 메밀꽃길 : 이옥진

메밀꽃길      이옥진    안개 속 하얀 메밀꽃길이  새벽이슬에 젖어 있다   왜 이슬은, 우리들  배고픈 눈물을 닮았을까   꽃 피는 9월이면  무작정 걷고 싶던 길   울 엄니, 야야~  '배 많이 고프쟈' 하며  속울음 울던 길   저녁이 와도 그냥  허리끈 꽉   졸라매고  환하게 웃고 걷던 꽃길      -전문-   ▣ 삶에 대한 평생 문안(발췌)_이옥진/ 시인   내 고향 어머니의 바다, 그곳은 나의 출생지이자 내 문학의 발원지이며 죽어서도 돌아가야 하는 영원한 내 정신적 성소 아닌가.             *  한때는 사회적 불의에 분통이 터져 현실 정치에 도전한 일이 있다. 2014년 제6대 하남시장 출마    결국은 패거리 정치판에 실패했지만, 역시 정치는 나 같은 원칙과 정의에 철저..

카테고리 없음 2024.07.23

식은 죽 먹기 외 1편/ 이상우

식은 죽 먹기 외 1편      이상우    노랑 개나리꽃 피는 봄날 !  입학생이 담장 위에 오뚝이처럼 서 있다.  "너 왜 담을 넘니?" 하지 않고     너 대단하다.  그렇게 높은 곳을 넘는구나 !   알토란같이 하얀 아이는     이런 것은 식은 죽 먹기예요.  합기도를 하거든요.     그러니, 합기도 대단하구나 !     검도도 해요.     검도까지 너 정말 대단한 아이다.  그런데 너 식은 죽 먹어봤니?     식은 죽, 식은 죽이 뭐예요?     식은 죽은 말이다. 아주 쉬운 것이다.   입학생은 파랑 운동화를 신고  운동장을 사로질러 뛰어간다.  뒤에다 대고     옛날에는 말이다.     식은 죽 먹기도  무척 힘이 들었다.     식량이 부족했으니까?        -전문(p. 58..

동시 2024.07.22

물총 싸움/ 이상우

물총 싸움     이상우    남녀 학생이 그늘 밑에 모였다  선생님의 고함소리에  남학생이 수돗가로 뛰어간다  어미젖 먹는 돼지처럼 물을 넣는다.   남녀 학생이 그늘 밑에 모였다  선생님의 교대 신호에  여학생이 수돗가로 뛰어간다  뽕잎을 먹는 누에처럼 물을 넣는다.   남녀 학생이 운동장에 뛰어간다  선생님의 손짓 하나로  오리물총 개구리물총을 쏜다  웃는 얼굴에 뿌려 가짜 눈물이 난다.   남녀 학생이 그늘 밑에 모였다  선생님의 안전교육 평가에   방어 없이 공격만 하는 물총 싸움  전사자, 부상자가 없어 재미가 있다.      -전문- ▶ 해설> 한 문장: '물총 싸움'에서 비유적 묘사가 돋보입니다. 같은 수돗물을 마시기에 남학생은 꿀꿀꿀 돼지처럼, 여학생은 오물오물 누에처럼 비유했습니다. 그..

동시 2024.07.22

참새의 꿈/ 이상우

참새의 꿈      이상우    교문 안 대추나무 한 그루에  어린 새 한 마리 엄마 찾나 봐  찍찍찍 찍찍찍  교문 밖 늘어진 전깃줄에  새떼들이 몰려와 야단치나 봐  짹짹짹 짹짹짹       엄마 그게 아니어요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세계 최고의 한글!     우리 새끼 제법인데  새떼들의 응원 박수 소리  짝짝짝 짝짝짝     -전문-   ▶ 해설> 한 문장: 하늘을 나는 새의 소리를 의인화한 느낌 있는 시입니다. 이처럼 따슨 온기가 묻어나는 고운 시를 그려내는 건 우리와 함께하는 작은 생명체에 대한 따슨 말과 고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착상이 새롭습니다. 새들이 조잘대는 '찍찍찍' '짹짹짹' 고운 소리가 어린이들의 소망스런 소리로 들려오네요. 대추나무 새 소리에 달려..

동시 2024.07.22

직업으로서의 시인(발췌)/ 양상추 : 이현승

양상추     이현승    최근에 「양상추」라는 시를 썼다. 나는 최근에 가늘고 희미한 것에 대한 감식안을 키우는 데 큰 희열을 맛보는 중이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와의 한 토막 전화 통화가 계기가 되어 쓰게 된 시이다. 고향에서 홀로 지내시는 노모와 하루 한 번 정도는 통화를 하는데, 노모에게 들은 말 한 토막이 내게 시적인 정념을 주었다.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해서 뭐하시느냐고 여쭸더니 어머니는 삼동이 지나가고 제법 볕이 다사한 날이라고 인근의 오일장에 가서 양상추를 하나 사 오겠노라고 포부를 전했다. 다섯 남매를 낳아 키우던 억척스런 어머니는 어디 가고 지금 어머니는 팔순의 노인이 되어 당신 몸 하나를 건사하는 것도 힘에 부쳐 하시곤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장에 가면 양상추를 진짜 하나 사서 들고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