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시집 · 뿌리 깊은 달 69

천만다행/ 정숙자

천만다행 정숙자 나는 여태 개인용 책상을 가져본 적 없다. 어릴 때는 언니 동생 번갈아 앉은뱅이책상을 썼고 시집온 후로는 줄곧 밥상이 책상이다. 밥때가 되면 문구들이 숟가락에 밀린다. 퇴역한 남편이 집사람 된 지도 어느덧 10년. 아침저녁 시간마저 일정치 않다. 구석구석 쌓여가는 서적들도 ‘없는 서재’를 그립게 한다. 그렇지만 내 안에 깃든 부엉이가 머릿속에 심어주는 말. 그래도 고맙다. 책상과 서재가 없는 집이나마 고맙다. 오다가다 서서라도 쓸 수 있으니 고맙다. 끼니 이을 수 있으니 고맙다. 깨알 글자 볼 수 있는 눈. 꼼지락거릴 수 있는 뇌. 나뒹구는 책들과 컴퓨터, 헌 종이와 가위, 문방풀도 곁에 있어 다 고맙다고맙다고맙다. 내가 정숙자라는 게 어디냐. 아버지가 잘못 지어준 이름이라고, 정말이지 ..

온음표/ 정숙자

온음표 정숙자 1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자연이다 여기기로 했다. 시골 태생인 탓도 있지만 남편(군인)을 따라 전방으 로, 오지로 전전하는 사이 나는 그야말로 자연 사랑의 졸개 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김제 만경 너른 들판은 내 태가 묻힌 고향이려니와, 부산 강릉 속초 삼척 묵호 정동진 안목 경포 대 삼포 물치 간성 거진 화진포 비무장지대에 이르기까지 동 해안 구석구석 정 붙이며 살았으니 왜 아니 그렇겠는가. 관 광객으로서는 결코 만나 볼 수 없는 매일매일의 색다른 파 도, 골짜기를 비집고 퐁퐁 솟아오르던 옹달샘, 아스라이 절 벽에 피어난 나리꽃……. 그 도드라진 풍경들을 뒤로 하고 아 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행을 결정했지만, 나는 누누이 스스로 를 위로해야만 했다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거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