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시집 · 뿌리 깊은 달

온음표/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3. 10. 2. 02:03

 

 

      온음표

 

       정숙자

 

 

   1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자연이다 여기기로

했다. 시골 태생인 탓도 있지만 남편(군인)을 따라 전방으

로, 오지로 전전하는 사이 나는 그야말로 자연 사랑의 졸개

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김제 만경 너른 들판은 내 태가 묻힌

고향이려니와, 부산 강릉 속초 삼척 묵호 정동진 안목 경포

대 삼포 물치 간성 거진 화진포 비무장지대에 이르기까지 동

해안 구석구석 정 붙이며 살았으니 왜 아니 그렇겠는가. 관

광객으로서는 결코 만나 볼 수 없는 매일매일의 색다른 파

도, 골짜기를 비집고 퐁퐁 솟아오르던 옹달샘, 아스라이 절

벽에 피어난 나리꽃……. 그 도드라진 풍경들을 뒤로 하고 아

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행을 결정했지만, 나는 누누이 스스로

를 위로해야만 했다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자연이야’ 라고.

 

 

   2

   내 이삿짐 속에는 유독 빼놓을 수 없는 물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호미다. 호미는 흙을 가꾸는 도구이니 백

지에 글을 심고 가꾸는 우리에게 빗댄다면 붓이나 다름없다.

나는 지금도 하루 한 번, 적어도 삼사일에 한 번은 호미를 든

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 영산홍이나 장미, 붓꽃 아래 파묻

어준다. 내 집이 아파트 3층이긴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손수

건만한 꽃밭이 건물 밑동에 딸려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도

심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호미를 댈만한 곳은 기다리고 있기

마련. 나비는 꽃들의 친구. 달팽이는 잎사귀를 빛내는 친구.

한여름에 왔다가 반짝 사라지는 그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즐

거워진다. 작년 이맘때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꽃밭 가장자리

에 나풀나풀 돋아난 질경이 한 주먹을 뜯어 씻고 씻었다.

 

 

   3

   엎어놓으려는 자배기 밑바닥에 컴퓨터한글 10호 크기의

이응 자만 한 달팽이 한 마리가 까뭇하니 붙어있는 게 아닌

가. “아이고, 이것아! 이파리 뒤쪽에 묻어왔구나. 으깨지지

도 떠내려가지도 않았다니! 용하다 기특하다 미안하다 아가

야!” 나는 일회용 투명컵에 질경이 두어 잎과 몇 방울의 물

로 습기를 조절한 다음 달팽이를 옮겨 주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였다. ‘당장 꽃밭으로 데려다 줄까? 아니야, 내일 보내

도 괜찮을 거야’ 결국 “하룻밤 묵어도 괜찮겠니?” 달팽이와

의논 끝에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봤다. 느릿느릿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순둥이. 하지만 무작정 컵의 주둥이까지 기어올라

습기라곤 없는 책상에 떨어졌다가는 큰일! 구멍 하나 빵 뚫

린 뚜껑을 덮었다. ‘얘야, 산책 다녀올 동안 가만 있거라. 안

심해도 돼’

 

 

   4

   달팽이 컵을 침대 곁에 세워두었다. 잠들기 전 나는 달팽

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내 방이야. 우리 부부는 각방을

쓴단다. 애들은 다 결혼했고 분가했어. 내 방은 담배 냄새가

안 나. 그러니까 네 건강을 해치진 않을 거야. 사람들의 집

이 어떻게 생겼는지 봐두는 것도 재밌잖니? 그럼 잘 자라.

낼 아침에 보자. 안녕-.” 이튿날 조반을 먹고 컵을 살폈더니

컴퓨터한글 10호 크기의 마침표만한 똥이 서너 점 눈에 띄

었다. 이파리에도 송송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마음 놓고 자고

먹고 싼 것이다. 나는 달팽이를 칭찬하며 여기저기 구경시켰

다. “이건 책장이야. 책이란 인간이 만든 것 중에 가장 훌륭

한 물건이지. 아참, 그리고 나는 시인이란다. 내 이름? 좀 이

따가 알려줄게. 여긴 부엌이야. 여기는 베란다. 그리고 이건

컴퓨터…….”

 

 

   5

   그리고 벌써 일 년이 지났다. 물론 나는 그를 제자리에 잘

데려다주었다. 그날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한 잔의 커피타

임으로 영원한 작별을 나누었다. 그는 찬바람이 불면 어느 별

인가로 돌아갈 것이고, 태양이 가까워져 다시 돌아온다 해도

어찌 알아볼 수 있으리오. 나는 다만 모든 달팽이한테서 그를

만날 것이다. 아니 ‘달팽이’라는 말만으로도 그가 떠오른다.

관계 맺음이란 그런 것일까. 그에게 내 꿈과 슬픔 한두 가지

를 말했던 것도 같다. 인간의 삶도 그리 완벽하거나 화려한

게 아니라고, 그네의 삶을 위로하려는 뜻이기도 했다. 오래

전 내 자연론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나보다.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자연이다. 아차! ‘좀 있다가 알려’주기

로 한 내 이름 어쩌지? 이제야 생각나다니 이걸 어쩐다지?

    -『시에』200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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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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