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우리
겨울 밀회
서윤후
수감자들에게 처음 눈싸움을 허락한 것은 이례적인 폭설이 지나고 이틀 뒤였다 눈 치우는 사역을 이토록 다정한 방식으로 알려줄 수 있을까?
눈사람들은 모두 눈 코 입 하나 없이 표정도 없이 앞뒤 분간도 없이 기분이나 마음도 없이 산발적으로 태어났다
베개는 차가운 것이 좋다고 한다 깊은 잠에 발이 빠져본 사람만이 헤맬 수 있는 꿈의 풍경은 창백했다 풍경을 기워 꿰매는 저 발자국을 따라가볼 거라고
멈추게 하려는 마음에 사로잡혀 영원히 움직이게 된 모빌도 있다
이번 겨울잠엔 선회병에 걸린 양들이 반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다 죽은 양을 둘러싸고 수호하듯 경건히 규칙적인 애도를 미쳐버렸다고 생각한 적 있었지만
맴돌았던 걸음만이 도착할 수 있겠지
설산엔 올라간 발자국만 찍혀 있는 일방통행이다 누구도 내려온 적 없어서 사라짐과 떠나감을 혼비백산으로 만드는 희고 눈부신 능선 위로 야마하 헬리콥터 하나 큰부리까마귀 한 마리·········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던 삶이 있었다 멈추게 할 수 없고 이 장황한 오목판화를 반복할 수 없었으니까
흐린 창문을 닦던 안경잡이는 자신이 여태껏 눈사람에게 단 한 번도 이름을 지어준 적 없었다는 겨울의 불화설을 살았다 미간이나 인중 혹은 보조개로 패여 있는 잠든 이의 얼굴 몰래 베끼며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깨어나는 사람은 되어간다 눈사람의 순서에서 낙오된 허수아비 떼처럼 바닥도 놓아준 사람들의 배웅 없는 이야기 안녕 뒤에 물음표나 느낌표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
잠들기 전 셌던 양을 또 센 것 같다며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도가 있다 올해 첫눈이 쇄도하는 줄도 모르고 잠을 뒤척인다 사다리 없는 이 층 침대 위에서
-전문- 172-173
▶희미하고 불완전한(발췌)_안지영/ 문학평론가
발산되지 못하고 내향적으로 파고드는 윤리에 대한 강박에 때로는 그 자신을 소진시키는 함정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더구나 불확정적 주체이기를 계속함에 따라 주체는 왜소해지고 또 고독해진다. 사소한 말과 행동이 원하지 않는 폭력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은 주체의 입지를 한없이 위축시키고 만다.
(···)
세계를 바꾸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결벽증적 윤리 감각을 적용하고자 하는 불균형 속에서 이들은 종종 딜레마에 빠진다. 이런 맥락에서 슬픔도 슬픔이거니와 아무리 닦아도 유리 위에 남아 있는 얼룩처럼 없어지지 않는 죄책감이 비치고 있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다. 무해한 존재가 되고자 하였던 자신의 선택 역시도 완전무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이 죄책감의 형태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p. 시 148-150/ 론 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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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4-2월(410)호 <현대시작품상 최종 후보 4_를 읽고> 에서
* 서윤후/ 시인, 2009년『현대시』로 등단
* 안지영/ 문학평론가, 저서『천사의 허무주의』『틀어막혔던 입에서』, 역서『부흥 문화론: 일본적 창조의 계보』(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