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전과 이후의 나날들/ 김명철

검지 정숙자 2020. 2. 4. 02:02



    이전과 이후의 나날들


    김명철



  우리는 며칠째

  산속 바람소리 같은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침대로 기어오르는 뱀의 눈을 찌르고

  살을 베어 먹다가

  엄동의 화사한 배꽃 아래를 걷기도 합니다

  버려진다는 것

  내던져진다는 것

  구멍이 점점 커져 바람이 드나들고

  풍화되어 먼지로 부서져 내린다는 것

  우리는 산에 올라 바람을 맞으며

  없는 다람쥐를 보고 억지로 흥얼거립니다

  먼지바람에 붙어있는 갈고리 형상의 미숙한 영혼을 마시며

  얼음을 깨고 얼굴을 빠뜨려

  한동안 계곡물을 마시는 척합니다

  발파되는 바위에 붙어있던 흙부스러기처럼 날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불어지지 않는 휘파람을 붑니다

  우리는 부유물처럼 떠내려갑니다

  손도 잃고 눈도 잃고 몸도 잃고 어두워지고 있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데

  마른 나뭇잎의 속도로 생각이 흩어집니다

  동면에 실패한 개구리의 사체처럼

  영하零下의 사랑이 푸석하게 말라 부서지기만을 기다립니다

  부서져 날리기만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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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토피아』 2019-겨울호 <신작시> 에서

   * 김명철/ 2006년『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짧게, 카운터펀치』『바람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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