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집『끝나지 않는 대화』 / 발췌
시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
이성복
* 시인이 자신의 주관적 개인적 체험의 변용을 배제하거나 포기할 때, 시는 어떤 행위를 위한 수단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p-12)
* 내용에 젖줄을 대고 있지 않은 형식은 이미 살아 있는 형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p-13)
* 저에게는 변화하는 이 삶,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p-27)
* 산문을 쓰다 보면 어떤 부분은 시보다 나은 경우도 있어요. (p-40)
* 발견은 사랑 없이는, 인생에 대한 애정 없이는 안 됩니다. 대상이 '빌려 주지' 않으면 발견은 불가능해요. (p-43)
* 인생이 헛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투자를 안 한 사람입니다. (p-44)
* 어렵게 해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당시 내 체중이 오십 킬로그램이 못 되어 신체검사 기준에 아슬아슬했어요. 마침 형이 해군 의무병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큰 도움을 받았지요. (p-57)
* 카프카나 플로베르는 당장 굶더라도 문학은 가르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글 쓰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게 누드쇼 하는 것 같아요. 학생들이 내게서 글쓰기의 기교를 훔쳐 간다는 게 문창과 선생으로서 괴롭습니다. 선생으로서 나는 그냥 교양 선생이 가장 어울릴 것 같아요. (p-59)
* 문학이란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말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모든 것이 허위가 되는 어떤 것, 혹은 그것을 말함으로써 그 나머지 모든 것듣이 추문이 되고 스캔들이 되는 어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매우 창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온하게 보이기도 하고 유치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문학은 그렇게 더럽고 어둡고 추한 자리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말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우리가 여기에 살아 있다는 것을 뜨겁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놈 저놈에서 이분 저분으로 끌어올려 줍니다. 마지막으로 문학은, 등을 긁을 때 오른손으로도 왼손으로도 닿지 않고, 위로 긁는대도 아래로 긁는대도 닿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는 것과 같이, 도저히 침투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공간에 대한 증명이고 그리움입니다. (p-94, 95)
* 나는 이런 얘기를 듣고 싶어. 자, 저 사람 참 열심히 했다. 가톨릭 노래 중에 이런 게 있어. "임의 전 생애가 슬펐기에 임 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라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건 참. 그래, 내 열심히 했다, 눈물나, 그지? 이거 말고 더 있나. (p-167) ( (p-205)
* 시는 표정 하나 얻는 거라. 뭐, 달리 아무것도 없지. 시로 세상을 이해한다? 아니지. 시가 누구를 위로하나? 그것도 아니지. 마지막까지 남는 건, 표정. 김인환(金仁煥) 선생이 이렇게 말했어. (가방에서 쪽지를 꺼내며) 요거 한 번 읽어 봐. "작품의 가치는 작가가 자기 운명에 대해 가지는 어떤 참됨에 비례한다" 근데 참되긴 불가능해. 참되려고 하다가, 결국 꺾어져. 하지만, (스윙 동작을 취하며) (팔을) 보내주고 (시선은) 나중에 가는 거. 무연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p-174, 175)
* 내가 학생들한테 마더 테레사 이야기를 자주 해요. 왜? 내가 너무도 그 얘기를 좋아하니까. 마더 테레사가 기도를 하는데 기자가 물었대요. 그래, 하느님한테 무슨 청원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 청원 같은 거 안합니다. 그냥 듣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다시 물었대요. 그러면 하느님이 당신한테 무슨 말을 해 주십니까. 그러니까 마더 테레사 말이, "말씀 같은 거 안합니다. 그분도 듣습니다" 이랬대요. 그게 바로 시의 자리거든요. 정확하게 시인의 자리, 참 눈물 나는 자리라! 그래서 사람들만 만나면 계속 이 이야기를 했어요. 듣는 공부가 최고라고! (p-200, 201)
* 사실, 사람이 망가지면 글도 같이 망가지는 것 같아요. 글이 망가지면 사람이 멀쩡해도 망가졌다고 보면 돼요. (p-206)
* 어떤 선생이 학인들한테 이야기했대요. 세상에 오래 살면서 보니까, 모든 욕심에서 벗어나도 명예심에서는 못 벗어나는 것 같더라. 그러니까 제자 하나가 하는 말이 "맞습니다, 선생님. 제가 수많은 스승들은 만났지만, 선생님만큼 명예심에서 벗어난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니까, 그 선생이 좋아하더래. 바로 그 좋아하는 자리가 명예심의 자리잖아요. 그게 참 안 떨어지는 거예요. 숨넘어 가야 떨어지지. (p-208, 209)
* 진실이라는 것은 매 순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진실은 '진실화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고 해도 되겠지요. 시작(詩作)을 뜻하는 '포이에시스(poiesis) 역시 본래는 '만듦'을 뜻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은 카프카였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믿음이라는 것은 통속적이고 피상적이며, 이데올로기이고 공동환상입니다. 시가 만들어내는 진실은, 비록 만들자마자 녹아내리는 눈사람 같은 것일지언정, 이 이데올로기 혹은 공동환상으로서의 믿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p-215, 216)
* 흔히 직유가 원시적이고 피상적인 비유라고들 합니다. 고트프리트벤이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릴케를 폄하했던 건 릴케가 직유의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직유는 멜빵 중에서도 느슨한 멜빵이라는 것, 직유로는 시가 단단해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직유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가장 유치한 것은 형태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대상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안 쓰는 것만 못합니다. '단풍잎은 우리 아가 손바닥'이라고 말해 봤자 이런 식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가 없죠. 그러나 새의 날개와 사람의 팔처럼 형태적으로는 전혀 다르지만 구조적으로는 유사한 것을 연결하는 것은 다릅니다. 말하자면 형태의 유사성이냐 구조의 유사성이냐의 문제인 거죠. 사다리 타기로 치면, 전자는 아랫줄의 'A'에서 윗줄의 '가'로 연결되는 것이고, 후자는 '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구조주의의 용어를 사용해 본다면 전자를 아날로지(analogy), 후자를 호몰로지(homology)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날로지 층위에서의 유사성에 의거한 비유는 세상을 오히려 더 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호몰로지 층위에서의 유사성은, 색맹검사를 할 때 보이는 숫자처럼, 어느 순간 문득 올라옵니다. 시는 바로 그것을 위해 쓰는 것이고, 그게 올라오지 않으면 덜 쓰인 것이죠. 그러므로 직유를 쉽게 풀리는 비유라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컨대 김수영(金洙暎)의「절망」에서 '절망이 절망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이라는 구절을 생각해 보세요. 직유를 이런 식으로 걸어 버리면 이것은 풀리지 않습니다. (p-219, 220)
* 장식으로서의 비유는 그것을 붙이건 떼건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세계를 바꾸는 비유가 아니면 그것이 비유건 은유건 결국 조미료에 불과합니다. 국 맛이 아니면 그것이 직유건 은유건 결국 조미료에 불과합니다. 국 맛이 나면 거기에 조미료를 넣을 필요가 없지요. 조미료를 친 사람을 보면 그이가 진짜 국 맛을 모르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논어(論語』에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이 나오지요. 백지가 있어야 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려진 그림들을 지우고 백지를 만드는 것이 먼저입니다. 피상적인 비유라는 것은 이미 그려진 그림 위에 또 그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요. 결국 시가 하는 일이란 인생의 진실을, 즉 '불가능'의 자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의 자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또 문학의 진실이라는 것은 그 꺼풀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벗겨낸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러나 어쨌건 해 보는 것입니다. 좋은 비유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드로잉을 하는 것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게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동행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존 버거의 말입니다. 뭘 봤다고 해서 그것을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무엇'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살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뭐와 비숫하냐 하면, 우리가 길에서 깡통을 보면 툭 차지 않습니까. 딱히 깡통이라서 차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게 있더라도 찰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게, 차는 사람의 의도대로 굴러가지를 않습니다. 어떻든 굴러간 그 자리에 가서 다시 찹니다. 잘 굴러갈 수도 있겠고 맨홀에 빠질 수도 있겠지요. 계산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동행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과정입니다. (p-221, 222)
*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隱修者) 얘기도 재미있어요. 천국 문 앞에 한 발을 들여놓은 마카리우스에게 악마들이 "위대한 마카리우스, 우리는 너한테 졌다!"며 기립박수를 하자, 그는 한 발을 마저 들여놓으면서 "아직은 아니다" 했다는 거예요. 그 마지막 한 발이 그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한 거잖아요. '아직 아님'을 뜻하는 '미(未)'자 한 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자 식으로 말하면 '인(仁)을 원하는 것이 인'이며, 틱낫한 식으로 말하면 '평화로 가는 길이 평화'이니까요. (p-285, 286)
*「토니오 크뢰거」의 표현을 좀 바꾸어 말하자면, 예술가는 '길(道) 잃은 도인(道人)'이에요. 그는 탈속도 환속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 길 가운데 어느 한쪽도 놓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존재방식이지요.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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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 『고백의 형식들』/ 2014.9.20 <悅話堂> 발행
* 이성복/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1977년 시 「정든 유곽에서」를 계간 『문학과 지성』에 발표하며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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