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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로 포장된 역사』강기옥/ 발췌

검지 정숙자 2014. 10. 28. 21:16

 

 

     『문화재로 포장된 역사』/ 발췌

 

       강기옥(시인)

 

 

 

* 일상적인 조어법에서 벗어나 새롭게 나타난 신조어(新造語)나 길거리에 내걸린 플래카드의 문구는 당시의 문화를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코드 역할을 한다. 언어는 문화를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등장한 언어들은 언중(言衆)에 의해 쉽게 일반화되고 나중에는 일상적인 언어가 되어 긴 생명을 유지한다.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고 잡혀 갔다가 돌아온 여인 환향녀(還鄕女)를 비하하여 '화냥년'이라 한 것이나,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코를 베아가자 민중들이 위험한 것을 보면 아비(我鼻〓내 코)라고 한 것이 'ㅣ' 모음동화현상에 의해 '애비'라고 한 것들이 그 좋은 예다.  

  '화냥년'은 양반사회의 가치관이 인간이 처한 한계상황보다 우선하던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된 용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만행에 정절을 잃은 아낙네들을 부정한 여인으로 간주하여 이혼을 청구한 양반들이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간 여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이들을 환향녀라 했으나 이들을 역시 부정한 여인으로 간주하여 이혼을 청구한 것은 조선 사대부들이 얼마나 옹졸했던가를 반영한다. 국력신장보다는 정권유지를 위해 당쟁에 치우치다가 나라는커녕 자기 가족조차 지켜내지 못한 양반들이 죽지 못해 살아 돌아온 아낙네들을 부정한 여인으로 몰아세운 것은 국가의 도의가 형식에 치우쳤음을 의미한다. 다행히 당시에는 이혼을 하고자 할 경우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기에 선조나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낙인찍힌 여인들은 제대로 마누라 구실을 못하고 첩을 들인 남편과 사회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야 했다. 환향녀가 서방질을 한 여인이라는 화냥년으로 의미변화를 일으킨 것은 바로 그때문이다. 국가의 잘못으로 선량한 여인들이 죄인의 누명을 쓰고 사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인조는 홍제천에서 몸을 씻은 여인들에게는 정죄하지 못하게 하는 사면령을 내렸다. 홍제(弘濟)는 홍제원에서 비롯된 이름이지만 곧 널리 구제한다는 뜻을 살린 인조의 애민사상이 반영된 곳이기도 하다.

  전라도에서는 '애비'는 두려움의 대상에 대한 공포심리가 반영된 용어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어린 아이들에게 손대서는 안될 위험한 것을 '애비'라 한다.  p-35.

 

  * 회화나무는 옛날부터 우리 조상이 길상목(吉祥木)으로 여기던 신목(神木)이다. 집안에 이 나무를 심으면 학자가 난다 하여 학자나무라고 했고 잡신을 몰아내는 신령한 나무라 하여 신목이라 했다. p-61.

 

  * 시대는 언제나 그 시대에 맞는 인재를 요구한다. p-72.

 

  * 약자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이 비켜가고 강자 편에서 큰 줄기를 이루어 가는 것이 역사 같지만,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공평하다. 숱한 세월 속에서 때로는 답답할 정도로 침묵하기도 하고, 때로는 웅변 같은 사자후로 진실을 토해내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는 강물과 같다고 한다. 바위 덩어리든 침몰한 뱃조각이든 자잘한 모래든 모두를 감싸 안고 잔잔히 흐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거친 물길로 쓸어내기도 한다. 그것이 역사의 속성이요 무심하지 않은 세월의 진실이다. p-86.

 

  * 사육신 중에 그들의 충절을 비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아니 미련한 짓이다. 누구의 공이 크고 작은가를 따진다는 자체가 피 흘려 죽은 충신과 역사를 우롱하는 짓이다. 다만 사육신이나 생육신에 포함되지 않았더라도 뜻을 같이하여 끝내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충신들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 아쉽다. 예를 들면 청재 박심문(1408~1456)은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사육신과 더불어 거사를 계획했던 사람이다. 그가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중 의주에서 사육신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육신으로 더불어 죽기를 맹세했는데 혼자서 살 수 없다'며 음독 순절하였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성원도 집에서 아내와 이별주를 나눈 후 자결하지 않았던가. 그들을 저자는 번외의 사육신이라 칭한다. 성가산의 사육신 공원에는 적어도 당시에 뜻을 같이 하여 죽은 '번외의 사육신' 내역도 같이 안내해야 옳다. 장릉배식록에 이름이 올랐어도 일반인에게는 주로 사육신만 얄려졌기 때문이다. p-89.

 

  * 2007년 4월 1일 이후 청와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로, 경복궁은 '종로구 사직로 22번지'로 바뀌었다. (…) 각 분야에서 최고를 상징하는 1번지는 도심의 중심지가 어디인가를 판정하는 기준으로도 작용한다. p-98. (…) 99.

 

  * 두리기둥은 왕실의 건물이나 대웅전과 같은 건물에만 사용할 수 있다. p-103.

 

  * 약속은 상호간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결정하는 다짐이다. 제도적인 힘의 강요에 의해서 맺는 것은 일방적 계약이며, 사회적 제도나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맺는 약속은 서약이다. 서약이 전근대사회에서는 대부분 권력층에 의한 충성맹약이었다면 오늘날에는 혼인서약이나 어떤 모임의 일원으로서 행동 규범을 지키겠다는 공개적인 약속이다. 약속, 계약, 서약 등은 본인의 선택이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적극적이며 강한 결속력을 발휘하는 약속이 있다. 의를 맺는다는 결의(結義)다. p-163.

 

  * 피서가 더위를 피해 달아난다는 의미라면, 척서는 더위를 씻어낸다는 뜻이다. p-187.

 

  * 가끔 '이름 모를 꽃'이라거나 '이름도 없는 산'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산이 작다보니 사람들이 이름을 붙여 부르지 않는 탓이기도 하겠고, 볼품없는 꽃과 나무에게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작가의 매너리즘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리라. 하찮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작가에게는 매우 편리한 방법이겠지만 그러나 이처럼 무책임한 표현도 없다. 보잘것 없는 사물도 이름을 알고 대하면 그 외양에서만 느끼는 것과는 다른 정감이 솟아난다. 사람도 이름을 부르면 쉽게 친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을 무책임하게 이름 없는 꽃이라 하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p-193 (…) 194.

 

  * 문화는 일방적일 수는 없다. 주고 받는 것이 문화의 속성이다. 문화 후진국이라는 말은 문화상대주의를 무시한 강대국의 오만이었다. 아무리 후진국일지라도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다. 한때 문화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티벳의 조장(鳥葬)을 보고 잔인하다고 했다. (…) 그들은 땅에 시신을 묻는 것은 가장 큰 죄인에게 해당하는 형벌로 여긴다. 그래서 살인자와 같은 중죄인을 땅에 묻는다. 그것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 윤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아예 땅 속에 가둬버리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함부로 논할 이유는 없다. 지진이 많아 화장하는 일본문화를 두고 시신을 태운다고 탓하지는 않았다. 필요에 의해 삶을 꾸려가는 인간의 지혜다. 그것이 문화의 본질이자 민족끼리 지켜내는 원형질적 유전자인 것이다. p-230.

 

  * 부석사는 오전보다는 오후에 찾아 답사하고 해질녘에 범종 소리를 들으며 하산하는 것이 아름답다. 스름스름 산그림자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산줄기를 물들여 오는 황혼은 인도 사람들이 극락세계를 서방정토라 한 이유를 알게 한다. p-271.  

 

  * 일반적으로 팔작지붕은 대웅전, 궁궐, 사대부 집과 같은 화려한 집에 사용하고 맞배지붕은 제사 지내는 건물에 사용한다. 종묘나 사당의 건물이 맞배지붕인 이유가 그것이다. p-277.

 

  * 청백리는 살아 있을 때의 명칭이 아니라 죽은 관리에게 사용하는 명칭이다. 초창기에는 살아 있는 사람을 청백리라 했으나 명종 이후에 염근리(廉勤吏)로 바뀌었다. 살아 있을 때 청백리라는 호칭이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에는 염근리, 죽은 후에는 청백리로 시호(諡號)처럼 사용한 명칭이다. 황희, 맹사성, 류관을 가리켜 세종조 삼청이라 하여 조선시대 관리들의 귀감으로 삼은 것은 그런 시대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p-289.

 

  * 신도는 곧 죽은 자의 무덤길이므로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니, 신도비는 곧 죽은 자의 무덤길에 세운 비석이다. 이 주변을 지나갈 때는 몸가짐을 바로 하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p-292.

 

  * 아버지만 생각하면 정조는 임금이 아니라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 앞의 소년이었다. 아버지 무덤에 도착하면 군왕의 체통은 생각지 않고 소년처럼 목놓아 울었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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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기행, 국사 교양서 『문화재로 포장된 역사』/ 2012.4.1 <한누리미디어> 펴냄

   * 강기옥(시인)/ 전북 김제 출생, 시집『오늘 같은 날에는』『내 안의 기쁨으로』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