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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견문록』강기옥/ 발췌

검지 정숙자 2015. 2. 2. 00:38

 

 

    『국토견문록』/ 발췌

     

       강기옥(시인)

 

 

   황현의 매천야록 - - - 구례

   제야 사학자 매천(梅泉) 황현(1855.12.11~19.9.10)은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 생가와 묘지가 있는데도 구례의 인물로 부각되는 것은 어린 시절에 구례와 광양을 오가며 공부하다가 11세부터 구례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 후 천사(川社) 왕석보의 문하에서 공부한 후 출사(出仕)했고 다시 하향하여 후학을 가르친 곳이 구례이며 나라를 빼앗겨 음독자살한 곳도 구례다. 석주관의 칠의사가 왜란 중에 보여준 구례의 정신이라면, 매천 황현은 구한말 일제에 나라 빼앗긴 슬픔을 선비의 기개로 보여준 구례의 정신이다. 매천은 관료생활을 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벼슬살이를 접은 꼿꼿한 기개로 이 시대의 식자층을 통렬하게 꾸짖는다. 식자답게 나라를 사랑하라고.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는 매천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나라가 망했는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선비로 살아온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며 절명시를 남기고 자살한 것이다. 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고민하던 매천은 9월 10일 소주에 아편을 섞어 마시고 절명했다. 사망일은 묘하게 사망연도 1910에서 앞의 1을 빼면 똑같은 910이다. 나라가 망한 해와 같은 날을 택하여 약을 마셨는지 묘하게 일치한다. 아우 황원에게 마음이 약해 세 번이나 약사발에서 입을 뗀 것이 부끄럽다고 고백하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 매천은 '유자제서(遺子弟書)'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이 나라가 선비를 키워온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한 날 선비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내가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평소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통쾌함을 누리리라. 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배우고 익힌 학문을 실천하는 선비가 있어야 한다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계가 이미 망해 버렸으니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네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曾無支厦半椽功 (증무지하반연공)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으니

     只是成仁不是忠 (지시성인불시충)  단지 仁을 이룰 뿐이요, 忠은 아닌 것이로다

     止竟僅能追尹穀 (지경근능추윤곡)  겨우 능히 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當時愧不躡陳東 (당시괴불섭진동)  당시의 陳東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  4연의 절명시 중 3연과 4연

 

   4연의 윤곡(尹穀)은 남송시대 진사였는데 몽고족 침입으로 나라가 망하자 집에 불을 질러 자살했고, 진동(陳東)은 북송시대 충신이었는데 흠종이 죽위하자 간신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황제의 미움을 사 죽임을 당했다. 매천도 을사늑약 이후 상소를 올려 송나라의 진동처럼 죽임을 당했으면 차라리 떳떳할 텐데 그러지 못한 자신의 죽음이 한스럽다는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고 전제했다. 벼슬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이 있는 위치도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의 패망에 초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황현은 죽음으로 인해 그의 시와 정신이 살아났다. 초야의 선비가 조선 말기 3대 시인의 반열에 오른 것도 그의 의기 있는 죽음 때문이며, 한국인의 가슴에 큰 울림으로 남아 있는 것도 국가를 위해 목숨을 던진 용기 때문이다. 조국이 무엇인지 생각케 하는 그의 절명시는 나라가 어려울수록 생각나는 지도자의 모습이다.

 

  매천은 스스로 벼슬길을 접었다. 29세(1883년) 때 과거에 응시하여 첫째로 뽑혔으나 한미한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점자로 강등되자 초시 합격자가 이차로 보는 회시(會試:어전에서 합격자 문과 33명, 무과 28명의 등급을 결정하는 시험)에 응하지 않고 낙향해버렸다. 그만큼 의기가 곧은 강골이었다. 그래도 부모님이 출사할 것을 원하자 34세 때 생원시에 장원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성균관에 머무는 동안 관리들의 부패상에 실망하여 다시 구례 월곡마을로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며 저술과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p,106~108.

 

 

   사거광주(死居廣州)의 김자수 - - - 광주

   상촌(桑村) 김자수(1352~1413)는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색이 책임자로 있던 성균관에 입학하여 정몽주와 이숭인에게 배웠다. 충청도 관찰사 이후 형조판서에 이르렀는데 기울어가는 국운을 한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두문동 72현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새 왕조에서 그곳마저 불살라버리자 고향 안동으로 내려갔는데 이성계가 그를 대사헌으로 불렀다. 태조의 부름은 거절했으나 1413년 태종은 그를 다시 병조판서로 부르며 어명을 받들지 않으면 전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는 한양길에 올랐다. 그의 뒤에는 장례용품을 챙겨 든 아들 근(根)이 뒤따랐다. 추령(秋嶺:분당과 광주 사이의 태재)에 이르자 스승 정몽주의 묘를 향해 절을 올리고 절명시를 남겼다. 그 때가 태종13년(1413) 11월 14일, 향년 63세였다.

 

     平生忠孝意 (평생충효의)  평생 품은 충효의 뜻을

     今日有誰知 (금일유수지)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一死吾休恨 (일사오유한)  한 번의 죽음 내 한함이 없으니

     九原應有知 (구원응유지)  저승에서 응당 알 이 있으리

 

   마지막으로 둘러본 산천은 이미 고려가 아니라 조선이었다. 그 먼 길 안동에서부터 올라와 굳이 이곳을 죽음의 장소로 택한 것은 불사이군의 전범을 보인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스승을 해친 조선왕조에서 벼슬살이를 한다는 것은 성리학을 송두리째 거부하는 것이요, 스승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 편의 시에 장부의 뜻을 남기고 약을 마셨다.

 

     "나를 이곳에 묻고 비석을 세우지 말라."

 

   아들에게 남긴 이 마지막 말은 끝까지 고려를 지키지 못한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망한 나라에 자기의 행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철저한 선비정신인 것이다. 그의 무덤 앞에 서면 남다른 감회가 솟는다. 다른 묘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비석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훈을 거스를 수 없어 비석을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8세손 김흥욱(1602~1654)이 비문을 새겨 땅 속에 묻어 두었다. 학주 김흥욱은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한 척화파의 강경론자였다. 1651년 홍충도(洪忠道: 지금의 충청도) 관찰사 시절에는 대동법을 처음 실시하였고 1654년에는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응지상소에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 소현세자빈)가 억울하게 죽었으니 원한을 풀어줄 것도 포함했다. 응지상소는 임금이 신하에게 구언(求言)하여 올리는 상소인 만큼 자문을 듣기 위한 방법으로서 어떤 문제를 다루더라도 불문에 붙이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종통과 관련이 있는 강빈의 이야기를 8년이 자난 시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김흥욱도 이 상소로 인해 죽을 것을 각오했는지 아버지의 묘 옆에 묻어달라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결국 효종의 친국을 받다가 장살당했다.    

 

     "옛날부터 말한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습니까? 신은 용봉, 비간과 더불어 지하에서 함께 놀겠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눈을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 두면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보겠습니다."

 

  감히 임금 앞에서 할 만한 말이 아니다.  그렇게 강직한 후손이기에 8대조 김자수의 일생을 비석에 새겨 땅에 묻어둘 수 있었다. '왕대 밭에 왕대 나고 참대밭에 참대 난다'는 속담이 속설이 아님은 실증하는 사례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인 것이다.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김자수의 비석은 1928년에 후손들에 의하여 빛을 보았다. 그러나 차마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훈을 거스를 수 없어 세우지 못하고 눕혀 놓았다. 땅 위에 누워 있는 비석을 보면 절개를 지키다 죽은 영혼이 편안하게 안식하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서 있어야 할 비석이 누워 있으니 처연한 생각이 든다. 안쪽으로 비각 안에 세운 비석은 비문이 마모되어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p,214~216

 

 

   사육신 김문기 - - - 옥천

   남효온(1454~1492  단종2-성종23)은 단종 복위운동 당시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공부하면서 알게 된 역사를 '육신전'에 기록하여 세상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상징인 충신들을 알렸다. 그 당시는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위험한 상황에서도 '육신전'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남효온은 생육신으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세간에는 남효온을 폄하하기도 하나 그를 생육신이라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세조가 등창이 나고,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죽고, 정희왕후 윤씨의 어머니가 급사하고, 꿈에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로부터 가위눌리는 등 좋지 않은 일이 자꾸만 겹치자 세조는 형수인 문종비(현덕왕후)의 소릉(昭陵)을 파헤쳐 물가로 옮겨버렸다.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세조는 그렇게 패륜의 악순환을 빚었다.

   그 누구도 감히 나서서 반대하지 못하던 일을 남효온은 성종대(1478년)에 이르러 소릉을 복위할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남효온은 김시습처럼 유랑생활을 하다가 49세로 생을 마쳤다.

   세조와 권신들의 야합으로 다른 피의 대가를 치러 세조는 당대에도 벌을 받았고 그의 손자대에서도 철저한 대가를 치렀다. 성종대의 폐비 윤씨 사건에 이은 연산군의 사화(士禍), 그리고 중종반정에 이르기까지 세조에 의해 탄생한 권력은 조선 전기를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했다. 연산군에게 김종직은 가능하면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버리고 싶은 가시였는데 마침 소릉(昭陵) 복위상소를 올린 남효온이 김종직의 제자인 것을 알고 1504년 갑자사화 때 그를 부관참시(剖棺斬屍)해버렸다.

   소릉은 1713년(중종8)에 원위치로 복구되고 남효온도 신원(伸寃)되어 좌승지에 추증된 이후 정조6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불사이군의 상징처럼 알고 있는 사육신이라는 용어를 일반인에게 알린 '육신전'은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간행되었고 이후 생육신의 창절사(彰節祠)에 제향되었다. 그는 분명 생육신의 호칭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가 만년에 쓴 육신전도 사료적 가치가 있음은 물론이다. 김문기에 대한 기록으로 1970년대에 사육신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는 단서를 제공했지만 그 의도는 차치하고 당시에 기휘(忌諱: 입에 올리기를 꺼리는 이름이나 사건)를 다루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용기 있는 학자였음이 분명하다. 

   백천 김문기는 옥천군 이원면 출신으로 단종 복위운동 당시 공조판서 겸 3군 도진무로서 군사를 동원하는 책임을 맡았다. 김질의 밀고로 실패한 거사는 사육신과 생육신이라는 충신을 낳았으나 남효온의 '육신전'에 김문기가 빠져 충절의 상징인 사육신의 명단에 들지 못했다. 이는 세조실록의 기록으로 보아도 김문기의 행적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유응부와 혼란을 일으킨 결과라 하여 김녕김씨 문중에서 이론을 제기했다. 즉 남효온의 육신전에 기록된 유응부의 사실은 김문기의 사실을 잘못 기재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유응부가 아닌 김문기가 사육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세조실록 2년 6월 8일조에 역적의 주모자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순으로 육신만을 들었다는 점과 김문기가 도진무로서 군 동원의 책임을 맡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정사인 세조실록이 남효온의 육신전보다 중요한 사료라는 점을 주장의 근거로 내세웠다.

   이로 인하여 문화류씨와 감정 대립으로까지 발전할 소지가 있었으나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와 문교부 등 관계부서에서 논의하여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고 그의 가묘도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래서 사육신 묘역에는 일곱 분의 묘가 있고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p,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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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고향의 숨은 이야기 『국토견문록』에서/ 2014.4.20. <도서출판 화백> 펴냄

  * 강기옥/  전북 김제 출생, 시집『오늘 같은 날에는』『내 안의 기쁨으로』등

                  역사기행『문화재로 포장된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