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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현상학/ 조르주 풀레‧김진국 옮김

검지 정숙자 2015. 4. 15. 17:26

 

 

     독서의 현상학

 

     조르주 풀레 ‧ 김진국 옮김

 

 

  1. 독서 현상 : 두 의식의 同化

 

  말라르메의 미완성 소설 《이지튜르》의 서두는, 펼쳐져 있는 책이 놓인 책상이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한 빈방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와 같은 묘사는 누군가가 책을 붙잡고 읽지 전까지의 모든 책이 처해 있는 상황일 것이다. 책은 한 대상물이다. 책상 위에서, 서가 위에서, 그리고 서점 진열장 안에서 그들은 누군가가 와서 그의 질료성을, 즉 고정의 껍질을 벗겨 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바라볼 때에는 마치 조그만 우리에 갇혀 팔리기를 기다리는, 즉 분명히 한 구매자를 소원하는 동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쳐다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동물들은 그들의 운명이 인간의 중재에 의하여 좌우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대상물로서 다루어지는 수치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인간의 중재를 감사히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우리는 책의 경우에 대입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종이와 잉크로 만들어진 그들은 그들이 놓여져 있는 장소에, 누군가가 그들에게 관심을 보여 주기 전에는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다린다. 한 인간의 행위가 갑자기 그들의 존재를 변혁시킬 것임을 알고 있는지는 일단 의문이 간다. 그들은 마치 그러한 희망에 취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나를 읽어주시오 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들의 요구를 저버릴 수 없을 것처럼도 보여진다. 아니다. 책은 다른 사물들 가운데 있는, 예컨대 대상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느낌을 그들은 나에게 준다. 나는 때때로 다른 대상물과 같이 책을 소유한다. 예를 들면, 화병과 조각품들과 함께 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재봉틀의 주의를 삥 들러보거나 접시의 밑바닥을 뒤집어 보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나에게로 향하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나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각품은 그의 주위에 원을 그릴 것을 요구한다. 화병은 손에 들고 돌려가며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나에게 그들에게는 다른 각도에서 보면 무언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꽃병이나 조각품은 그들의 표면을 향한 고착된 시점으로는 결코 완벽하게 보아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표면과 더불어 그것은 내면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내면이 행하는 바가 마치 비밀의 방의 입구를 두리번대는 것처럼 나에게 호기심을 일으키게 하고, 또 그들의 주위에 원을 그리게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러한 입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꽃병의 주둥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다만 꽃을 꽂을 작은 공간의 입구일 뿐임으로 진정한 입구는 아니다.) 그러므로 화병과 조각품은 닫혀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로 하여금 그들의 밖에, 외부에 남아 있을 것을 강요한다. 무언가 거북한 느낌으로 우리는 결코 진정한 친밀감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책이 그들과는 같지 않기를 소망한다. 꽃병을 사서 집에 가져와 책상 위나 벽난로 선반 위에 올려 놓으면 그것은 곧 스스로에게 가사집기의 일부분이 되어질 것을 허락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해서 그것은 꽃병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 반면에 책을 들었을 때에 당신은 그것이 자신을 펼쳐 보기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에게 그토록 감동을 주는 점은 바로 이 서적의 개방성이다. 책은 외형적 선 안에 폐쇄되어 있지 않으며 성곽처럼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스스로가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기를,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그의 내부에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즉, 다른 말로 한다면 책을 대하고 있는 상황의 특수성이란 당신과 책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즉, 책은 독자의 내면에 존재하며. 그럼으로 해서 외부와 내부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독자가 책을 앞에 하고 독서를 시작할 때에 언제나 발생하는 최초의 현상인 것이다. 나의 정신은 내 앞에 스스로를 개방하고 있는 한 대상물에서부터 파도쳐 오는 의미내용을 파악하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내 손에 더 이상 하나의 단순한 대상물이 나 또는 한 생명력 있는 존재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한 이성적 존재를, 즉 한 의식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매일 대면하게 되는 모든 인간들에게 자동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그런 타인의 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책의 의식은 나에게 자신을 열어 보여 주며 나를 환영하며 나로 하여금 그 자신의 내면의 심연을 들여다 보게 하며 더욱이 미증유의 허가권으로서 그가 사고한 바를 사고하도록, 그리고 그가 느낀 바를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미증유의 것이다. 객체가 객체성을 상실함이야말로 실로 미증유의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내 손에 쥐고 있는 이 책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내 손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곳에 있지 않다. 즉,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책이 종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면에서 분명히 한 객체이면서 그것은 내가 읽어나감에 따라, 그리고 그것을 끝마치는 순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엔 책은 결코 물질적 객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질료성을 벗어 던진 후에 존재하기 시작하는 일련의 단어, 이미지, 관념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존재자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분명히 종이라는 질료 속에 있진 않다. 즉, 외면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새로운 존재자를 위해서는 단 하나의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나의 가장 깊숙한 내적 자아이다.

  어떻게 이러한 현상은 발생하는가? 어떠한 방법에 의하여, 즉 누구의 중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일까? 어떻게 나는 일반적으로 자신을 닫고 있는 것에 전적으로 나의 마음을 개방할 수 있게 되는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독서하는 동안에 나는 서적 가운데에 스스로 자리잡고 있는 수 많은 의미를 나의 마음속에서 지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역시 대상물이다. 즉, 나의 사고의 대상으로서 이미지, 단어, 관념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 해도 그 대상은 중대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책은 꽃병, 조각품과 만찬가지로 외적세계에 존재하는 즉, 다른 여타의 사물들과 공존하는 한 대상이다. 그 세계 속에서 각 사물들은 그들 자신의 고유의 사회를 이루며 그 사회에 기대어 배타적으로 존재한다. 나의 사고에 의하여 사고될 필요없이, 그러나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단어, 이미지, 관념들은 그러한 내면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유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적 실체들은 내가 부여하는 나의 내면세계에 안식처를 그의 존재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나의 의식에 기대어 존재한다.

  이 기댐은 불명예이면서 동시에 장점이다. 이미 언급되었듯이 정신의 간섭 없이도 존재할 수 있음은 외적 객체의 특권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바의 전부는 홀로 존재하고픈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영위하고자 한다. 그러나, 내적 객체는 명백하게 그와는 다르다. 개념정의에 의하여 벗어 버리도록 강요되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순수한 정신적 실체인 이미지, 관념, 언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신적 실체로서 존립하기 위하여 책은 현실적 객체로서의 존재성을 단념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점은 유감스러운 것이리라. 내가 나의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을 한 서적의 언어의 지각으로 대체하자마자 나는 나 자신을 허구의 전능한 힘에 양도하여 구속되어진다. 나는 언어의 포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양도는 피할 수 없다. 언어는 그의 비현실성으로 나를 포위한다.

  반면에 리얼리티의 언어를 통하여 허구적 현실에로 전이할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이점인 것이다. 허구의 세계는 객관적 현실보다 더 유연한 세계이다. 허구의 세계는 그 자신을 어떠한 유용에도 맡긴다. 그것은 정신의 끈질긴 요구에도 거의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이러한 언어에 의해 구성된 내면세계는 어떠한 장점보다도 그것을 사유하는 나에게 전혀 거역하지 않는 장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언어를 통하여 파악되는 것들은 의심할 바 없이 객관적 외형을 상실하지 않은 정신적 형식인 것이다. 그들은 대상물, 즉 주관화된 객체이다. 언어의 중재에 의하여 모든 것은 나의 정신의 일부가  되므로 주관과 그의 객체 사이의 대립은 현저하게 소멸된다. 문학이 인간에게 주는 최대의 이점은 내가 문학을 추구함으로써 나의 의식과 그 대상 사이의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불가양립성에서 자유스럽게 된다는 점이다.

  이 점이 도서행위를 통하여 나의 내부에 기록되어지는 주목할 만한 변형인 것이다. 나의 주위에 내가 읽고 있는 서적을 포함하는 모든 물리적 객체가 소멸되는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독서행위는 나 자신의 의식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외연적 사물을 정신적 객체의 일단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대상물과 함께 영위하는 가운데 맺어지는 친숙성은 나에게 새로운 문제점을 제기한다. 나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요소인 사고들을, 즉 타인의 사유들을 나 자신의 사유의 대상으로 가지는 그런 추구이다. 나는 곧 타인의 사유들의 주관인 것이다. 나는 타인의 사유를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타인의 사유를 타인의 사유로서 생각하고 있다면 물론 어려운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마치 바로 내 자신의 것인 양 생각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유는 즉 외부로부터 오는 사유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는 그런 「나」가 있다. 그러나 그 「나」는 그 외부적 사유들을 사고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외부적 사유들을 나의 것으로 떠맡으려는 「나」이다. 바로 이 점을 디데로는 「나의 사유들은 나의 매춘부이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즉, 그들은 그들의 작가에 속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이 경우에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다. 타인의 사고들에 의하여 나의 인격이 침해됨으로 해서 나는 나에게 낯설은 타인의 사고들을 사고하는 경험을 허락받게 된다. 나의 의식은 마치 그것이 타인의 의식인 것처럼 행위하는 것이다.

  이 말은 깊이 생각되어져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어떠한 관념도 실제에 있어 나에 속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만 한다. 관념은 어느 누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동전이 사람에게서 사람에로 전해 가듯이 관념은 한 사람의 정신에서 다른 사람의 정신에로 전파되어간다. 결과적으로 의식이 발아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관념으로 한 의식을 규정하려는 시도야말로 가장 무모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관념이든가 그 관념을 그 원천에 결속시켜 주는 끈이 얼마나 강하든가 내 자신의 마음 속에 머무름의 무상함이 어떻든 간에 내가 그 관념을 마음에 품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나는 내 자신이 그러한 관념의 주체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바로 주체적 원리이다. 즉, 모든 관념은 이 주체적 원리인 나를 위해 언어적 진술이 되어 헌신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주체적 원리를 하나의 언어적 진술과 같은 것으로 즉 무언가 토론되어진 것, 또는 언표되어진 것으로써 인식해서는 결코 안된다. 사유하고 명상하고 언행에 참여하는 자는 바로 나이다. 그 주체적 원리는 결코 그가 아니라 나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내가 하지 않는 언어적 진술인 일련의 언어에 대한 주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차라리 모순이다. 내가 무언가를 사유하자마자 그 무엇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 자신의 것이 됨을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듯 그것은 나의 정신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타인의 정신세계에 명백히 속하고 있는 한 사고를 하고 있으며 그 정신세계는 마치 나는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나 가운데서 생각되어지고 있다. 이미 개념들은 이해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모든 사고는 그것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한 주체를 소유해야만 하기 때문에 나에게 낯설면서 동시에 내 안에 있다. 그러한 사고는 나에게 낯선 한 주체를 내 안에 소유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내가 책을 읽을 땐 언제나 나는 정신적으로 하나의 「나」를 발음한다. 그러나 그 발음되는 「나」는 나 자신은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삼인칭일 경우에도, 그리고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고 다만 반성이나 주장만이 있는 경우에도 그와 같다. 왜냐하면 무언가가 사고로서 주어지자마자 나는 나 자신을 망각한 채 비록 잠시 동안일지라도 나에게 낯선 한 사고하는 주체에 동화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랭보는 「나는 한 타인이다」고 말하였다. 또, 하나의 「나」는 내가 책을 읽는 동안은 나 자신을 제쳐 내고 대신 들어앉는다. 독서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즉, 낯설은 단어, 이미지 관념들의 주인에게 길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이야기하고 비호하는 매우 낯선 원리에도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이 현상은 정말 설명하기 어려울 뿐더러 이해하기조차 힘들다. 그러나 일단 인정되어질 때엔 그것은 딴 방법으로는 훨씬 더 설명 불가능한 것까지도 나에게 설명해 주게 된다.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주체적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나는 내가 읽은 바의 것을 이해하게 할 뿐만 아니라 느끼게끔 하는 그 놀랄 만한 기능을 설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나의 정신을 유보시킴 없이, 즉 나 자신의 판단에 있어 독립성을 견지하고픈 욕망을 가득 안고 책을 읽을 때 나의 이해는 직관적이 되며,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느낌은 즉각적으로 나에 의해 환기되어진 것이 된다. 바꾸어 말한다면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이해란 미지의 것에서 기지에로의 이동, 낯선 것의 친숙화, 외부적인 것의 내면화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한 현상으로서, 정신적 객체가 의식의 저츰에서 나와 인지의 빛으로 부상하게 하는 현상이라 말하여 질 수 있는 것이다. 또 한면으로는 독서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가지는 통각(統覺)과 같은, 즉 나는 그 독서행위에 의해서 내가 생각한 바를 한 주체(이때의 주체란 나가 아니다)에 의하여 사고되어진 것으로 파악하게 되는 그런 통각과 유사한 무엇을 포함한다. 내가 참아 내어야 할 낯설음이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독서는 나의 행위를 주체로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독서란 그렇다면 내가 「나」라고 부르는 주체적 원리가  엄밀히 말하여 내가 더 이상 그 주체적 원리를 나의 「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는 면에서 수정되어지는 행위인 것이다. 나는 타인에 기대어 존재한다. 그리고, 이 타인은 나의 내면 가운데서 생각하고 느끼고 괴로워하며 행위한다. 그 현상은 「이 소설이 나를 사로잡는다」고 말하는 데서 가장 명확하게 간결하게 표현되어진다. 이렇게 내 타인에 포획되어짐은 객관적 사고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즉 독서하는 동안에 나에게 향하여 드러나는 이미지, 감성, 관념들에 관계하고 있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나의 주관성의 차원에서도 생겨난다. 독서에 몰입되어 있는 동안 제 2의 자아가, 즉 나를 위해 사고하고 느끼는, 「자아가 출현한다」. 그렇다면 나의 정신을 이완시키고 뒤로 물러서게 할 때 나는 그와 같은 나의 박탈당함을 침묵 가운데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로부터 어떤 안락함을 얻게 되는가, 또는 반대로 분노감에 젖어들게 되는가? 그러나 이 문제 이전에 내가 절대적으로 나 자신에게 질문해야 할 것은 누군가가 무대의 중앙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야기되는 문제이다. 그 중심 부위를 점유하고 있는 찬탈자는 누구인가? 스스로 나의 의식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정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만일 그것을 내가 「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말 「나」일 것인가?

  이 문제의 해답은 즉각 찾아진다. 아마도 너무 대답하기 쉬운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독서할 때 내 안에서 사고하고 있는 「나」는 그 책을 쓴 「나」이다. 내가 보들레르나 라신을 읽고 있을 때 그「나」는 나의 내부에서 읽혀질 것을 허락하고 사고하고 느끼고 있는 보들레르, 라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권의 책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작가가 그의 관념, 그의 정서 그의 꿈과 삶의 양태를 그것에 의하여 보존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죽음으로부터 그의 동질성을 구원하는 그의 유일한 방편이다. 이렇게 독서의 현상을 해석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지는 못하리라. 문학 작품을 전기(傳記)에 의하여 설명하려는 노력을 고찰할 때 더욱 위의 말을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문학의 언어는 그것을 창작한 사람의 정신 또는 영혼에 의하여 잉태되어지고 산출되어진다. 그가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읽도록 하였을 때 그는 우리의 내부에서 그가 사고했던 것, 느꼈던 것들의 상관물을 일깨워 주고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문학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조한 한 개인이 그 스스로를 우리의 내면 가운데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을 설명하는 것이 전기가 아니라 차라리 작품이 우리로 하여금 전기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전기적 해석은 부분적으로 오류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한 작가의 작품과 그의 생의 경험 사이에 아날로지가 존재함은 분명하다. 작품들은 불완전한 삶의 전사(轉寫)일지도 모른다. 또한 한 작가의 모든 작품들 사이에 더욱 중요한 아날로지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작품은 그것을 읽고 있는 동안 그 자신 고유의 삶을 나의 내부에서 영위한다. 나의 독서를 통하여 나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는 그 주체는 작가가 아니다. 작품 위에 군림하는 주체는 다만 작품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군의 전기, 연보, 원전, 그리고 일반적 비평 지식들은 모두 작품을 이해하려는 나에게 있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식은 작품의 내적 지식과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보들레르, 라신에 대해 얻은 정보의 총체가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들의 천재성에 어느 정도 접근하여 친숙하게 나의 삶을 영위하든 간에 그들이 그 작품 고유의 내적 의미, 형식적 완벽성, 그리고 그것을 낳게 한 주체적 원리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바는 충분한 것이 못된다. 여기서 진정하게 문제되는 것은 나의 내면으로부터 그 작품과 즉, 그 작품 자체와 동화되어 사는 일임을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독서현상의 전부인 것이다. 작품 외적인 어떠한 지식도 작품으로부터 나에게 전해오는 고유한 주장들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거기에, 나의 내면에 존재한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나의 이목을 그에게 집중토록 하게 한다. 나의 내면 가운데에서 작품은 그 의식이 자신을 규정하게 하는 경계선을 긋는다. 나에게 일련의 정신적 대상물을 강요하고 나의 내부에 한 언어 조직망을 창조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작품인 것이다.

  그리고 작품은 나의 의식을 가득 채우는 정신적 실재를 형성한다. 작품은 또한 그 작품의 내면에 그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의식, 즉 자아주체인 의식이다. 나의 의식을 작품의 움직임에 맡김으로써 나는 작품을 존재에로 이끌어 가게 된다. 나는 작품에 존재를 부여할 뿐 아니라 작품으로 하여금 존재를 인식케 하여 준다. 책은 독서행위에 의하여 활력소를 얻게 되어 생명력을 획득하게 되고 하나의 인간적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책은 그 스스로를 인식하고 그 자신의 대상물에 대한 주체로서 내 안에 자신을 만들어 내는 정신적인 것이 된다.

 

                                                                         

 

  * 『현상학』p-191~199/ 1992년 9월 20일 초판 1쇄 발행/ 저자 박이문 外

  *  김진국/ 서강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현재 원광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저서 『현대문학비평론』, 역서 『문학현상의 이론과 실제 등』(1992년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