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지붕, 화양연화 외 1편
이혜선
마당 가득 샛노란 이엉 뭉치가 쌓인 날, 동짓달 초하루 바람 자는 날 남늪아재 덕암양반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 키 큰 옹칠이 아재가 아래에서 두루마리 이엉뭉치를 올려주면 위에서 받아 추녀의 끝에서부터 두루루 펼쳐 지붕 전체를 꼭 안아주었다. 빗자루로 스윽스윽 쓸어서 볏짚이 골고루 퍼지면 새끼줄로 동여매어 꼭꼭 눌러주었다. 정침과 사랑채를 사방 돌아가며 추녀 끝에 삐죽 내민 볏짚을 가지런히 면도해주면 짧은 동짓달 해가 어느덧 똥맷등 너머로 꼴깍 숨었다. 머릿수건 벗어 툭툭 털어 땀을 닦고 횃불 아래 둘러앉은 저녁상에 막걸리 덕담이 구수하다
지금도 바람맞이 산고개 넘다가 되돌아보는 그
높은 음자리표
-전문(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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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대나무
중국 땅 안휘성 황산 가는 길
첩첩 산속에 자라는 무소대나무
5년 동안 쉬지 않고 물 주어도
땅 위로는 한 치도 안 자란다
지친 마음에 아차 잊어버리면,
땅속뿌리는 하얗게 말라버린다
5년 동안 부지런히 뻗어난 땅속뿌리에서 어느 날
문득 싹을 틔운 무소대나무
한 주에 30세티미터씩 쑥쑥 자란다
2미터가 넘는 키로 하늘마음 쓸어주고
뜨거운 땅의 속앓이도 식혀준다
50년 동안 꿈쩍 않는 나의 대나무는
무소대나무의 변종이다
장대비 후려치는 날
흙속에서 꿈틀, 닫힌 문 열고 있는 무소대나무
마디진 맨발을 보았다
-전문(p.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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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집 『불로 끄다, 물에 타오르다』에서/ 2024. 9. 15. <문예바다> 펴냄
* 이혜선/ 1950년 경남 함안 출생, 1981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神 한 마리』『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새소리 택배』『흘린 술이 반이다』등 6권, 저서『문학과 꿈의 변용』『이혜선의 명시 산책』『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아버지의 교육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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