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몽상의 나무/ 김숲

검지 정숙자 2023. 10. 6. 00:59

 

    몽상의 나무

 

     김숲

 

 

  산 밑 저수지 모래톱 위에 메타세쿼이아 나무 세 그루 서 있다

  그 앞에 갈대숲이 자라고 모래톱 위 나무와 나무 사이

  가느다란 물길이 흐르고 있다

  모래톱에 새 한 마리 종종거리고

  왼쪽 무릎 위에 왼손을 턱에 괴고 있지 않아도 깊은 생각에 잠긴 나무들

  발밑을 지나가는 물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통통통 새들의 잔 발걸음 소리에도

  저수지 건너 아파트 숲속에 인간 세상이 아무리 들끓어도

  큰길 차들이 소음을 흩뿌리며 쌩쌩 달려도

  때죽나무 꽃이 하얗게 피고 지고

  도토리가 알알이 익어 가도

  눈발이 휘날려도

  묵상에 잠겨 홀로 고요한 나무들

  생각의 뿌리로 내 머리채를 잡아당긴다

  난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을 물고기로 만들어 저수지에 풀어놓는다

  물고기들 저수지 곳곳을 헤엄치다 나의 머릿속으로 돌아오고

  나무와 눈이 마주치자 나, 나무가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저물어 가는 나날들

  생각이 없다면 내가 없고 너도 없고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고

  한참을 그 앞에 서게 하는 나무들  

  이 세상 풍경이 아니다 

      -전문(p. 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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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목문학회 사화집 『즐거운 곡선에서 배회 중』에서/ 2023. 8. 10. <파란> 펴냄 

  * 김숲/ 2014년 『펜문학』으로 등단, 시집『간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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