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3시 17분, 바지랑대 끝의/ 김뱅상

검지 정숙자 2023. 10. 6. 02:05

 

    3시 17분, 바지랑대 끝의

 

     김뱅상

 

 

  바지랑대에 달랑거리던 햇살 흘러내린다

  옥상 난간 벽에 그림자 한 폭 자라다 흔들린다 데생 작업 중인가?

  

  누가 그리는 묵화일까? 바지랑대, 그림 속으로 고개를 내밀자

  화폭엔 비스듬, 웬 不 자?

 

  그림자, 마지막 획 하나 여태 찍지 못하고

  저 자리, 새 한 마리 앉으려나?

 

  그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바지랑대, 짧은 그림자를 낙관인 양 뭉개는데

  그 새, 한 발만으로도 이 계절 견딜 수 있다는 걸까?

 

  세상엔 마음대로 되는 게, 있다

  새 한 마리 앉았다 간 그림 속 자꾸만 자라나고

 

  새 한 마리 또, 날아와 점을 찍고 간다

  흔들리다 사라지는 획, 不

  누군가 자꾸만 쓰다가 지우는

 

  그림자 한 계단 내려서고 나, 그림 속으로 흘러내려

  아니다 아니다, 자꾸 날 지워 가는

     -전문(p. 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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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목문학회 사화집 『즐거운 곡선에서 배회 중』에서/ 2023. 8. 10. <파란> 펴냄 

  * 김뱅상/ 2017년 『사이펀』으로 등단, 시집『누군가 먹고 싶은 오후』『어느 세계에 당도할 뭇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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