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 17분, 바지랑대 끝의
김뱅상
바지랑대에 달랑거리던 햇살 흘러내린다
옥상 난간 벽에 그림자 한 폭 자라다 흔들린다 데생 작업 중인가?
누가 그리는 묵화일까? 바지랑대, 그림 속으로 고개를 내밀자
화폭엔 비스듬, 웬 不 자?
그림자, 마지막 획 하나 여태 찍지 못하고
저 자리, 새 한 마리 앉으려나?
그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바지랑대, 짧은 그림자를 낙관인 양 뭉개는데
그 새, 한 발만으로도 이 계절 견딜 수 있다는 걸까?
세상엔 마음대로 되는 게, 있다
새 한 마리 앉았다 간 그림 속 자꾸만 자라나고
새 한 마리 또, 날아와 점을 찍고 간다
흔들리다 사라지는 획, 不
누군가 자꾸만 쓰다가 지우는
그림자 한 계단 내려서고 나, 그림 속으로 흘러내려
아니다 아니다, 자꾸 날 지워 가는
-전문(p. 66-67)
---------------
* 시목문학회 사화집 『즐거운 곡선에서 배회 중』에서/ 2023. 8. 10. <파란> 펴냄
* 김뱅상/ 2017년 『사이펀』으로 등단, 시집『누군가 먹고 싶은 오후』『어느 세계에 당도할 뭇별』
'사화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국가/ 안창호 (0) | 2023.10.09 |
---|---|
망향/ 최용운 (0) | 2023.10.06 |
몽상의 나무/ 김숲 (0) | 2023.10.06 |
그림 없는 미술관 1/ 윤유점 (0) | 2023.10.05 |
아버지가 사랑한······/ 최영화 (0) | 2023.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