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숫눈길/ 김현지

검지 정숙자 2022. 7. 23. 01:35

 

    숫눈길

 

    김현지

 

 

  그곳에 가 보아야지

  고라니가 긴 목을 늘이고 먹이를 찾고 있을

  숲속 새하얀 숫눈길 따라 걸어 보아야지······

 

  아래로 내달리는 바깥의 수은주가 댕, 댕, 

  경고음을 울리는 겨울 끝 무렵

  멍하니 앉아 천정까지 닿은 책장을 바라본다

  책의 숲속에서 바람이 불고 강이 흐른다

 

  시서화詩書畵 빼곡한 저 숲,

  내가 스쳐왔거나 잊혀졌거나

  미처 눈길 못 주고 지나온 행간마다

  잉걸불로 남은 꽃불 모락모락 타오르고

  타다 남은 숯검정들이 파란 씨앗으로 일렁인다

 

  처음 눈 맞추며 켜켜이 젖어들던

  시의 능선, 산문의 골짜기, 고전의 언덕······

  오래전부터 내 곁에서 나를 길들인

  푸른 성채 같은 책들이 죽죽 뻗은

  자작나무 겨울 숲으로 걸어온다

 

  오래 잊고 있었던 새하얀 숫눈길

      -전문 (p.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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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유 제2집 『날마다 피어나는 나팔꽃 아침』에서/ 2022. 5. 9. <지혜> 펴냄

   * 김현지/ 경남 창원 출생, 1988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집『연어일기』『포아풀을 위하여』『풀섶에 서면 내가 더 잘 보인다』『은빛 눈새』『그늘 한 평』『꿈꾸는 흙』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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