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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백성일

잔디     백성일    살다가 보니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인다  얼굴에 윤기가 나고 좀 살만하면  누군가 사정없이 허리 부러뜨린다  수없이 당하고 원망과 불평도 했지만  하늘에 주먹질이다  죽은 듯이 참고 삭이고  사나흘 지나면 허리 틍증도 사라진다  어제를 잊어버리고,  서로 끌어안고 몸과 마음도 하나로  얽히고설키고 사랑하면서 하늘 본다  전설의 가훈은  절대로 하늘로 머리 쳐들지 마라  그저 핏줄끼리 서로 한 몸 되어  땅만 보고 살아라 하셨다  땅에 엎드려 죽은 듯이 숨죽이고  오늘도 무르팍 까지도록 기어간다  그래도 땅은 넓다     -전문-   시인의 말> 전문: 게으른 놈이 게으른 놈을 보고/ 참으로 게으르구나 하고 나무란다.// 우여곡절 끝에 6년 만에 3번째/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

도라산 역/ 최금녀

도라산 역      최금녀    나,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다  눈밭 사이로 마중을 나오는 팻말, 파주 도라산 역······   도라산 역은 내 마음속 맞춤 가락  '돌아가는 고향역'의 은어   들꽃이 필 때, 흰 눈이 날릴 때, 망향제단에 절 올리고  렌즈의 각도를 맞추고, 그 너머를 보고  기적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한 정거장 지나면 함흥이고  한 정거장 지나면······ 고흥이고, 사리원이고, 북청이다  귀가 닳았다  애가 닳았다   세상 모르게 잠이 든  도라산 기차역을 지날 때마다  나 당장이라도  운전석을 차고 앉아  북녘으로 머리를 돌려  200, 300킬로로 냅다 달려가고 싶다  천 만의 한숨으로 낡아가는  저 팻말들 하나하나 껴안고  울고 싶은  자유로야!  파주야!  도라산 역아!  ..

자결한 꽃 외 1편/ 강미정

자결한 꽃 외 1편      강미정    스스로 목을 베고 자결한 꽃을 보러 갔다   꽃나무는 눈을 내리감고 제 발등에 펼쳐진 고요를 보고 있었다   한 걸음 꽃그늘을 디딜 때마다 붉은 고요가 피었다가 사그라졌다   꽃을 밟고는 못 건너가겠다고 딸아이는 쪼그리고 앉아 꽃송이를 하나하나 주워 올렸다    꽃을 올린 두 손바닥은 오므린 꽃잎이 막 벌어지는 꽃 한 송이   꽃향기가 손금을 따라 붉게 번지고 고이고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나의 시간이 고요 속에 앉고   바닥도 없이 층층이 바닥이었던 나의 붉은 시간도 앉아  웃음도 뎅컹, 울음도 뎅컹, 스스로 목을 베고 자결한 꽃송이를 주워 들었다   눈부신 바닥의 암흑만을 딸에게 주게 될까 봐 나는 두려운데    밟을 수 없는 꽃송이 하나하..

둥근 자세/ 강미정

둥근 자세      강미정    둥글게 스민다는 말이  소리 없이 울고 싶은 자세라는 걸 바다에 와서 알았다  둥근 수평선, 모래에 발을 묻고 흐느끼다 스미는 둥근 파도,  나는 왜 당신의 반대편으로만 자꾸 스몄을까  내 반대편에서 당신은 왜 그토록 둥글게  나에게로만 빗물 보내왔을까  파도가 대신 울어주는 바닷가에서  둥글게 스민다는 말이 혼자 우는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를 대신하여 울던 당신이  어두운 곳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오래오래 혼자 울던 당신이  이른 저녁 눈썹달로 떴다 울고 싶은 자세로 웅크려 떴다  세상은 울고 싶은 자세로 몸을 웅크리다가 둥글어졌을 것이다  수평선이 저렇게 둥근 것처럼  나를 비추던 울음도, 나에게 스미던 당신도 수평선처럼 둥근 자세였다  모두 멀리 떨어져야 잘 볼 ..

무거운 작심 외 1편/ 강빛나

무거운 작심 외 1편     강빛나    바다 혼자 엄마를 지키게 놔둘 순 없어  CCTV를 설치했다   바람에 넘어질지 몰라요  이른 봄 밑이 미끄러우니 우리 삼 남매가 수시로 볼게요   한두 달은 핸드폰에 지문이 쌓이도록,  개불 구멍 찾아 집게손가락 후비듯이  고향 집 문턱을 드나들다가   이내 집안 가득 봄을 들여놓고는  분홍 바람 날리는 언덕을 지키느라  엄마를 까맣게 잊었다  오빠도 남동생도 저만치 꽃구경 속에 서 있었다   CCTV는 24시간 저 혼자 엄마를 기키겠지  행동 굼뜬 독거노인 돌봄이라는 명분을 걸고  사방 넓은 화각으로 자식보다 열심히  움직임을 감지하겠지   자식들의 생각은 그저 생각에 지나지 않을 뿐   개뿔!   속옷을 갈아입으면서도 한번 쳐다보고 씩 웃었을 엄마,  가는 ..

문어+해설/ 강빛나

문어     강빛나    내 높은 지능이 연체동물 중 최고라고 했다   머리만 좋을 뿐 나는 천애고아다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사는 습성 탓으로  겨울 바다 밑바닥을 헤매며 바닥의 맛을 너무 일찍 알았다   가끔 어른들은 집안을 봐야 그 사람을 안다고 했다 먹물을 뿌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매일 웃는 연습을 했다   그들은 나를 바다의 현자라 불렀지만 바다에서 훨훨 떠도는 무념은 알지 못했다   먹고사는 일에는 몸 쓰는 것이 중요해서 발바닥부터 아려왔다  바위에 함께 몸 비빌 형제 하나 없이 홀로 선다는 것   뼈대 없는 가문이란 것이  마땅히 후광 받을 곳이 없다는 것이  눈시울을 이렇게 붉히는 일인 줄 몰랐다   짧게 살더라도  한 번 눈멀었던 내 사랑 지워지지 않도록   文魚가 文語로 바뀔..

김성희_미니멀라이프, 버리고 갈 것만 남은···(부분)/ 참새들의 수다 : 이길원

참새들의 수다      이길원    방앗간 뒤적이는 참새들   뒤로 하고 전깃줄에 오른다  하나둘 모이는 참새 친구들  - 아침 햇살이 따뜻하지?  - 햇살 먹은 저 구름 좀 봐  - 영롱한 저 빛깔  - 어젯밤 별빛으로 시 한 수 옮겼지  서로 어깨 비비며 펼치는 수다  날갯죽지 퍼덕이며  배고픔도 잊은 듯 키득거린다  소소한 행복   무리 중 한 마리  푸드덕 새벽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또 한 마리  뒤따라 사라진다  다른 한 마리 몸을 들썩인다  - 어디 가려고?  - 저 안개 속. 천국인가 봐  - 먼저 간 친구들이 안 돌아오는 걸 보면  - 모두 가면 어쩐다니  - 누가 내 수다 들어 주니  친구 잃은 참새 몇 마리  허전이 남아 지저거린다*      -전문-    * 지저거린다: 소리내어 자..

황정산_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찾다(부분)/ 아프다 : 서철수

아프다     서철수    아프다  갈비뼈를 다 드러낸 것처럼 매우 아프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모래를 한 움큼 집어먹은 것처럼  핏덩이를 한 움큼 토하는 것처럼  많이 아프다.   비를 앞세워 비겁한 걸음을 했던 계절이  이제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석양이 깊게 들어오는 뜰에  실루엣만 남기고 있는 감나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의 빗소리  이 숨 가쁜 계절에  아프다     -전문-   ▶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찾다(부분)_황정산/ 시인 · 문학평론가  시인은 제목까지 해서 "아프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그만큼 고통이 가슴 깊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의 아픔은 늦가을에 "실루엣만 남기고 있는 감나무"라는 다른 존재로 인해서이다. 시인은..

빈속_한때의 것에게 보내는 인사(부분)/ 꽃의 귀향 : 김윤배

꽃의 귀향      김윤배    *  불룩해진 욕망으로 꽃의 귀향이 이루어진다   지상에 색색의 그림자를 남기고 돌아간 꽃의 영혼을 위해 슬픈 노래를 부른다   돌아가던 꽃이 뒤돌아보며 슬퍼하지 말라고, 다시 찾아올 거라고 위로한다   꽃의 말은 위로가 되지 못한다   내년이면 얼마나 먼가   그 먼 날을 기다릴 수 있을까   어둠 속에 꽃을 그리며 소리 없이 운다   눈물이 어둠 속의 꽃으로 핀다   꽃은 끝내 내게로 귀향할 것이다   *  수 없는 꽃 무덤을 꽃으로 가꾼다    -전문-   ▶ 한때의 것에 보내는 인사(부분)_빈속/ 고려대 교양교육원 강사  "어둠 속에 꽃을 그리며 소리 없이 운다"에서 '어둠'은 '마음의 어둠'을 의미한다. "눈물이 어둠 속의 꽃으로 핀다"에서 '꽃'은 시詩를 의미한..

비산동 그, 집 외 1편/ 박숙경

비산동 그, 집 외 1편     박숙경    왼쪽 머리카락이 몽땅 잘린 딸아이가 돌아왔다   웃다가 들킨 낮달 혼자만 바깥에 세워두고  문고리도 없는 미닫이문을 닫고서   집주인도 아닌, 내가 서러워 괜한 말을 마구 쏟아냈다   화난 엄마가 처음인 듯  아이는 다섯 살처럼 울었고  울던 울음을 낚아채고 주인집 여자가 자기 딸을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집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집에 있는 여자들은 아이를 돌보며 마늘을 까거나 알밤을 깎거나 우산을 꿰매거나, 가만히 놀지는 않았다  비산동이지만 가난했고 날개가 없었지만 자주 모여 밥을 비벼먹기도 했다  가끔은 없는 사람의 뒷말들이 귀신처럼 골목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온 여름 혈서만 쓰다가 열매 하나 매달지 못한 석류나무가 작은 마당을 지키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