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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네 백반집/ 황상순

영미네 백반집      황상순    궁금하다  돌을 건져 올려 어떻게 미역을 만드는지  푸른 물결을 어찌 통째로 치마폭에 담아올 수 있었는지  오늘 무슨 날이기에  남해바다가 가지미와 조개를 앞세우고  아침부터 뜨겁게 이곳에 들렀는지  단돈 오천 원에 돌미역국이 다 나오는지   영미야, 생일 축하해     -전문(p. 58)  ---------------------  * 시터 동인 제7집 『시 터』 2022. 11. 10.   펴냄   * 황상순/ 1999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름치 사랑』『사과벌레의 여행』『농담』『비둘기 경제학』등

변신/ 박판식

변신     박판식    내일 내 꿈은 핑크입니다  꿈도 가끔은 색깔이 필요하다는 게 놀랍습니다   핑크가 그렇게 다양한 줄 몰랐습니다  고흐의 핑크, 뭉크의 핑크, 마네의 핑크, 샤넬의 핑크  셜리의 핑크······  면접관의 서류철 속에서 꿈은 비닐 포장이 되어 하나씩 번호를 부여받고  보살은 불가해를 손에 넣습니다   보살은 온몸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183센티미터의 잘생긴 보살이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중생을 찾고 있습니다   생각은 전화처럼 옵니다, 받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매일매일 매 시각 분초 단위로 알람이 울립니다   훌륭한 생각에도 매너리즘은 있습니다  꿈속에서라도 아무렇지 않게 일생을 낭비하는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염라대왕 앞에서도 자신이 고객이라고 착각하는 중생은 있..

목련 정원/ 곽효환

목련 정원      곽효환    내 앞에 있으나 등 들리고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하늘 아래 가장 먼 거리를 봅니다   붉게 빛나면서 점점 어둠에 잠기는 봄날 저녁  어두울수록 환하게 빛나는 목련꽃 그늘에  내 얼굴은 잠겨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멀고 깊은 심연   먼 곳을 바라보는 그 사람은  저 너머와 이곳을 잇는 열쇠 구멍인데  아람어를 모르는 나는  꽃그늘 아래 덩그러니 앉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몸을 돌려 손 내밀면  내 마음은 요동치며  피고 지고 피고 지는 꽃들의 정원이 되고  뇌우가 쏟아지는 평원이 되었다가  낙엽 지고 눈 쌓인 설원이 될 터인데   어느새 꽃잎을 다 떨군 목련 정원에서  먼 곳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는 목련 한 그루를  나는 마냥 바라봅니다  ..

그 겨울은 없다/ 원탁희

그 겨울은 없다      원탁희    고구마가 주식이었던  내 유년의 겨울은 참 길었다  눈도 많이 내렸으며  처마 밑 고드름은  땅까지 길게 늘어졌다   먹을 것이 풍부한 지금은  겨울이 하루처럼 지나간다  눈도 내렸다 금방 녹아내리고  처마 밑 고드름은 보이지 않는다   해진 옷과 구멍 난 양말을 꿰매어 신고  눈 내린 조그만 골목길을  검정 고무신으로 내달리던 날들도   호호 언 손을 입에 불다가  겨드랑이 사이로 집어넣기도 하고  처마 밑 고드름 뚝 따내어  입에 넣고 쪽쪽 빨기도 했던 그날들은  이제 없다 그 찬란했던 겨울은   겨울은 겨울답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하는데   이제 그 겨울도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이제는 떠나고 없다   서산에 긴 그림자만 장승 되어 서 있을 뿐이다    -전문(..

이층 바다 교실/ 한이나

이층 바다 교실      한이나    이층 교실 창가에 기대어 흰 운동장 너머  바라보면 남해바다 한쪽이 정답다  바다가 있는 교실 풍경  몇 걸음 내달리면 닿을 아름다운 거리  내 스무 살 시에 그린 꿈의 자화상 한 장   바다가 없는 곳이 고향인 나는 꿈의 바다 대신  상춧잎 같은 산골 처녀 선생이 되었다  들판에 들꽃 지천인 봄날 때 씻긴다고  우루루 줄지어 아이들 냇가로 몰고  지루해진 오후, 냉이꽃과 싸리나무와 종달새  그리려 자주 언덕에 올랐다   뽀뽀한다고 달겨들던 코찔찔이 1학년 철이랑  가난해도 의젓했던 화전민 반장 준이는  너른 세상바다에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폐교로 만든 진도 시화박물관에서 다시  씀바귀 잎 같은 선생 노릇이나 해 볼까  이층 바다 교실 창가에서, 우두망찰  바다를 ..

홍용희_민중 변혁 운동의 전통과 우주 생명의 지평(부분)/ 황톳길 : 김지하

황톳길     김지하(1941-2022, 81세)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숲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

초파일 밤/ 김지하

초파일 밤      김지하(1941-2022, 81세)    꽃 같네요  꽃밭 같네요  물기 어린 눈에는 이승 같질 않네요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 꽃밭  살아 못 간다면 살아 못 간다면  황천길에만은 꽃구경 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 이를까요  벽돌담 너머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오색영롱한 꽃밭을 두고  돌아섭니다.  쇠창살 등에 지고  침침한 감방 향해 돌아섭니다.  굳은 시멘트 벽 속에  저벅거리는 교도관의 발자국 울림 속에  캄캄한 내 가슴의 옥죄임 속에도  부처님은 오실까요  연등은 켜질까요  고개 가로저어  더 깊숙이 감방 속으로 발을 옮기며  두 눈 질끈 감으면  더욱더 영롱히 떠오르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아아 참..

문상/ 이재무

문상         김지하 선생님에게     이재무    오월은 연초록 광휘로 번뜩이고  내 마음은 회색빛 우울로 가득하다  야생마처럼 질주하다가  사자처럼 울부짖다가  기운 다해 쓰러져  과거가 된 사람을,  저항에서 생명으로  전환한 시와 사상 때문에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한국의 프리드리히 횔덜린  시대의 불운한 사상가를,  이제는 생전에 그가 남긴 음성과 글을 통해 만나야 하리  바다는 벼랑에 부딪혀 깨어지는  물의 파편에 대하여 아무런 감정이 없다  실재 속 한 개체일 뿐인 인간은  누구도 주어진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  맨몸에 걸치는 비단조차  아플 것처럼 눈부신 햇살이 불편하다  오는 길 혼자였듯  가는 길 혼자인 이를  배웅하러 문상 간다     -전문(p. 36-37)   ---..

유목의 시간/ 최도선

유목의 시간      최도선    정오에 붉은 사막을 걷는 낙타들,  바람에 몰려다니는 모래가  각을 이루거나 언덕을 이루거나  대양을 향해 출항하는 배처럼  묵묵히 걸으며 자연에 대항하지 않는다   모래바다는 적색거성의 성채 활활 타오르고  소소초를 씹으며 태양을 향해 침 흘리며  이정표 없는 길을 가는 낙타들  제 그림자 칼날 능선 위에 남긴다   미라가 된 나무 곁에 서서  뒤처져 오는 낙타를 보며  어릴 적 달리기할 때 늘 뒤처지던 내 모습 떠올리며  마음 한 조각 모래 속에 묻는다  그곳엔 내 영혼도 들끓었던 옛날이 있었나 보다   붉은 사막  그 위에 파란 하늘  어둠과 함께 추워진 밤  태고 같은  고요   낙타는 가던 길 멈추지 않는다    -전문(p. 34-35)    * 블로그 주: 위..

우리 집이니까 외 1편/ 백성일

우리 집이니까 외 1편      백성일    하루 종일 기다리는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이상해요  여기는 전부 한국사람뿐이고  모두들 우리말만 해요  그런데요 그냥 좋아요   초등학교 1학년 마치고  주재원으로 온 가족이 독일 가서  이제, 6학년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손녀가 공항에서  도착과 동시에 온 전화다   지구촌 여기저기서  전쟁을 하는 나라들 생각할 때  우리나라는 천국이다  우리말과 우리글이 있는 나라  그럼 좋을 수밖에.     -전문(p. 37)       ----------------------     빼앗긴 날들    계절을 잊은 하루들  안갯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벽 아닌 벽에 막혀 버린 길  스쳐가는 바람이 세상을 조롱하고  흐르는 공허한 마음과  막연한 다짐이,  지난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