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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인_기행산문집『그러니까 사막이다』 「머나먼 나의 스와니, 아, 아프리카」

머나먼 나의 스와니, 아, 아프리카      김추인    또 떠날 것을 꿈꾼다. 미답의 낯선 땅을 꿈꾼다.  역마살 탓일 게다. 지리산 가시내는 늘 진화해야 한다는 강박감과 함께 내가 누구인가를 파고들었었다. 우리는 모두 한정판이므로 자기답게 살아야 마땅하므로··· 이런 자의식과 역마살이 나를 시인으로 세상을 떠돌게 하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언제였을까. 인사동 전시관에서 만난 '붉은 나미브'의 사진! 그 모래톱들은 오래 부동으로 나를 세워  놓았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저 붉은 모래의 나라를 가야 한다고 내 안의 여자에게 속삭였다. 그러고도 10년이 훌쩍 가버리는 동안, 神이 내 그리움을 엿보셨는가, 그 꿈이 실현되게 생겼으니···   문득 정초의 꿈이 선명하게 온다. 밤하늘 백조자리가 은빛 날갯짓으..

에세이 한 편 2024.05.20

김추인_기행산문집『그러니까 사막이다』에서, 詩) 푸치니가 토스카니니에게

푸치니가 토스카니니에게      김추인    크리스마스 날 FM에서 엿들은  아니리 한 대목이었다     동글동글 굴러가는 목소리의      푸치니와 토스카니니는 친구였어요 그땐 젤 좋아하는  사람에게 크리스마스 빵을 선물하는 것이 풍습이었죠   무의식 중에 푸치니는 토스카니니에게 빵 선물을 보낸 것이 생각났는데 곰곰 생각하니 다툰 기억이 났어요  혹시 용서를 비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돌려보내진 않을까 전전긍긍 생각다 못해 전보를 쳤지요   크리스마스 빵 잘못 알고 보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랬더니 답신 오기를  크리스마스 빵 잘못 알고 먹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푸치니와 토스카니니를 들으며  창밖의 눈발처럼 희죽희죽 웃었다  나도 그런 친구 하나 있었으면!..

에세이 한 편 2024.05.19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0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0      정숙자    가을은 사유를 자유롭게 합니다. 지친 영혼을 충전시켜 줍니다. 길 떠나는 철새들에게 손수건 흔들어 보이는 억새  꽃 언덕. 더 총총 더 맑게 떠오른 별들을 보노라면 제 삶에 얹힌 돌도 얼룩을 잊어버립니다. 아아 그러나 가을은 멈출 수 없는 외로움을 몰아옵니다. 마음이 맑아진다는 것 자체ᄀᆞ 외로움>이ᄅᆞᆫ 병환의 시초입니다. (1990.10.13.)               책이 우는 걸 보았습니다  사람이 울어도 차마 못 볼 일인데,  책이 울다니,  책이…,   삼십여 년 한곳에 세워두었던 책을 이사 와서 다시 가나다순으로 장서했거든요. 앗 그런데 표지 날개에 끼워진 첫 장을 어느 책에서 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날개 속에 여유분의 틈이 없어서 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0/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0      정숙자    가을은 사유를 자유롭게 합니다. 지친 영혼을 충전시켜 줍니다. 길 떠나는 철새들에게 손수건 흔들어 보이는 억새  꽃 언덕. 더 총총 더 맑게 떠오른 별들을 보노라면 제 삶에 얹힌 돌도 얼룩을 잊어버립니다. 아아 그러나 가을은 멈출 수 없는 외로움을 몰아옵니다. 마음이 맑아진다는 것 자체ᄀᆞ 외로움>이ᄅᆞᆫ 병환의 시초입니다. (1990.10.13.)                책이 우는 걸 보았습니다  사람이 울어도 차마 못 볼 일인데,   책이 울다니,  책이…,   삼십여 년 한곳에 세워두었던 책을 이사 와서 다시 가나다순으로 장서했거든요. 앗 그런데 표지 날개에 끼워진 첫 장을 어느 책에서 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날개 속에 여유분의 틈이 없어서..

삼십 대의 가로수 길 외 1편/ 한명희

삼십 대의 가로수 길 외 1편      한명희    담요처럼 쓸쓸함을 덮어쓰고 땡볕의 가로수 길을 걸었다   땡볕도 가로수 잎도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다   사실은 손발이 시린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몸이 안 좋은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돈이 없는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땡볕의 가로수 길에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에서 멀어질수록 외로움이 가까워졌다   외로움은 기체여서 속속들이 스몄다   외로움은 액체여서 계속 번져나갔다   사실은 외로운 것이 아니라 걸을 힘이 없는 것이라고 해도   사실은 외로운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것이라 해도   그것만이 사실이라고 해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영영 ..

대유목 시대/ 한명희

대유목 시대      한명희    나의 땅이 아니니  집을 짓지 않습니다   나의 대통령이 아니니  투표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한다지만  나의 신이 아니기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국경 근처가 의외로  경비가 허술합니다   사원이 있는 동네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방향을 제일 잘 아는 건 역시  유목민이고요   그들을 따라  핸드폰과 노트북을 챙깁니다   어디까지든 가볼 참입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에서 제목인 "대유목 시대"는 '디지털 노마드'를 지칭하고 있다. 디지털로 만들어진 사이버 세계에서는 국가가 지배하는 영토도 없고 신을 모셔야 할 사원도 없다.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넘어 자유로운 세계를 항해한다. 시인이 "투표하지 않"고 "사원이 있는 동네에서는/..

유성호_일찍 개화한 현대성의 시조시인 박재두(부분)/ 꽃은 지고 : 박재두

꽃은 지고      박재두(1936-2004, 68세)    아홉 겹 성곽을 열고 열두 대문 빗장을 따고  바람같이 질러온 맨 마지막 섬돌 앞  뼈끝을 저미는 바람, 추워라, 봄도 추워라   용마루 기왓골을 타고 내리던 호령 소리  대들보 쩌렁쩌렁 흔들던 기침 소리  한 왕조 저문 산그늘 무릎까지 묻힌다.   다시, 눈을 닦고 보아라. 보이는가  칼 놀음. 번개 치던 칼 놀음에 흩어진 깃발  발길에 와서 걸리는 어지러운 뻐꾸기 울음.      -전문(1981년)   ▶일찍 개화한 현대성의 시조시인 박재두/ 사량도의 시인(부분)_유성호/ 문학평론가      전남 통영의 사량도 능양마을에는 「별이 있어서」라는 작품이 새겨진 박재두 시비가 서 있다. 뱀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의 사량도蛇梁島는 한려해상국립공원 중..

광야/ 김남조

광야     김남조(1927-2023, 96세)    오늘 이미 저물녘이니  나의 삶 지극민망하다  시를 이루고저 했으되  뜻과 말이 한 가지로 남루이었을 뿐  생각느니 너무 오래  광야에 가보지 못하였다   그곳은 키 큰 바람들이  세월없이 기다려 있다가  함께 말없이 오래오래  지평을 바라보아 주는 곳  그러자니 어른이 좀 되어 돌아오는 곳   삶의 가열한 반의 얼굴,  혼이 굴종당하려 하면  생명을 내던지고 일어설 계율을  이 시대 동서남북  어느 스승이 일깨워 주는가  어느덧 나는 사랑을 말하지도 않고  번뇌하는 두통과도 헤어져    반수면의 수렁에서  안일 나태한 나날이다가  절대의 절대적 위급이라는  음습한 독백에 부대끼노니    필연 광야에 가야겠다  그곳에서 키 큰 바람들과  말없이 오래오..

도마뱀 꼬리가 보이는 계곡/ 신명옥

도마뱀 꼬리가 보이는 계곡      신명옥    달리는 소리에 계곡은 늘 깨어있고  앉기 편한 돌을 골라 발 담근 내가  소리 내며 달리는 투명한 물살을 들여다본다   불룩하거나 움푹 파이는 물의 굴곡은  정교한 사슬의 톱니들 같다   무수한 초침들로 분주한 도시의 하루  되돌릴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소스라치듯 욕망의 트랙을 달려간 바퀴들은  모두 어디에 가있을까   서늘한 그늘 좇아 자리를 바꾸는 내가  초침에서 분침으로 느슨해진다  나무처럼 하늘 향해 귀를 세우고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을 바라보는 지금  비로소 시간 밖으로 나온 것 같다   떨어진 잎이 뜬구름 위를 천천히 맴돈다  달려간 이들이 닿은 피안이 저곳 같아서  이쪽과 저쪽의 거리를 가늠하는 동안   미늘에 물려 기울어지는..

이름 名/ 노혜봉

이름 名      노혜봉    캄캄할수록 가득 차 하늘꽃이라 불러본다  아버지 얼굴 흐릿해 불화살 맞은 해바라기꽃이라 부른다  멍들어 가슴에 새긴 혈흔, 도장꽃이라 써 본다   나 죽으면 불러줄 이 없는 그 이름 실컷 불러본다  하루아침 훌쩍 지구의 회전문이 열려져, 그 옛날  우주로 출타하신 이후, 아무도 아버지 성함  써 드린 일 없는 노용석盧龍錫, 그 이름,   문갑 서랍을 열고 상자 속에 고이 모셔 둔  아버지 상아도장을 꺼내, 오랜만에 문질러 본다  싸늘한 돋을새김에 소름 살아 오르듯 촉촉한 체온  시집와서 생신날 제삿날 까맣게 잊고 못 챙겨 드린 일  밀린 참회록 내리 써 놓으면 꽃도장으로 지워 주실까   곤히 잠들어 있는 어머니 눅눅한 그늘 곁  가족관계증명서에 아버지 검지손톱 담뱃진 맡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