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지지 못한 약속
백무산
그 약속이 지켜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세월이 까마득 흐른 뒤에 그 사실을 알고
감전된 듯 눈앞에 번쩍 그려지던 그 길
열아홉 살, 모든 것이 시작되던 나이
우린 모두 어디론가 떠나야만 했던 나이
멀리서 내게 연락을 주기로 한 곳이 있었지
모두 부러워하던 그곳
하지만 나는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전화가 있는 친구에게 부탁을 하고 동해남부선을 탔지
남포가 터지고 철골들이 비명을 지르고
쇳가루 먼지 두껍게 뒤덮던 바닷가 철강공단으로
소식은 오지 않았고 친구는 떠나고 없고
그리고 모든 걸 잊었네 까맣게 잊어버린 일
사십 년도 더 지난 뒤에 알게 되었다네
내게 연락 않고 그 친구가 대신 갔다는 사실을
나는 청량리행 완행열차를 타기로 되어 있었지만
발이 묶였네 그 친구와 나는 반대의 길을
걸었네 모든 게 반대인 삶을
내게 왔어야 할 그 소식 놓친 일로
얼마나 달라졌을까 지나온 날들 기억에서 다 풀려나오면
어쩌자는 건가 원망해야 할까 고마워해야 할까
지난날 고통스런 시간들 새삼 밀려오지만
마치 누명 쓰고 옥에 갇힌 듯
아니 어쩌면 그 감옥이 나의 행운인 듯
줄을 잘못 선 건 맞지만
내 줄이 꼭 어디라고 할 순 없으니
어떻게 살았건 안타까운 생은 매한가지
오지 않은 날들이여 잘 가라 작별할 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길 위에 선 존재인가
그래도 꼭 한 가지 궁금한 건
그곳에서 누굴 만나서
사랑하고 미워하며 눈물 흘렸을까?
그 사람 어디선가 한 번은 스쳐 지나간 적 있던 사람일까?
-전문(p. 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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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 2024-여름(74)호 <시에 시> 에서
* 백무산/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로 등단, 시집『만국의 노동자여』『폐허를 인양하다』『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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