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들의 합창
윤고방
살아생전 그녀가 가르쳐 준 대로 세탁기를 돌린다
어설프게 더듬더듬 버튼을 누르면 무거운 회전통이 뒤뚱뒤뚱 돌아가는 사이 지나간 세월도 씽씽 살아나고 원심력에 이끌려 그대 익숙한 솜씨로 돌려대던 생글생글한 삶의 시간들이 줄줄이 엮여 올라온다
구정물에 젖어 축 처진 바지저고리는 습관성 토악질이 한창이다
눈물 콧물 젖은 손수건 길바닥 먼지 부시래기 온갖 잡동사니들이 서로 부딪쳐 아우성치고, 백동전 서너 잎 꼬불쳐 두었던 지폐 두어 장의 마지막 자존심, 주머니 깊은 밑바닥에 고집스럽게 가라앉아 있던 나사못 몇 개, 쇠 쪼가리들이 무대 가운데로 살금살금 기어 나와 사방 눈치를 살핀다
세탁기 안에서는 헛구역질인지 늘상 꾸르륵 소리가 흘러나왔다
쉰내 구린내 나는 목숨의 파편들이 물벼락에 놀라 비명을 지르고 더러는 거품을 물고 까무러치다가 마침내는 문명 내음새로 무장한 퐁퐁 몇 방울에 말갛게 얼굴 씻기고 흰 구름 거품에 샤워를 하면서도 입술은 노상 부르터 있었지 헌데 참 신기하지 뭔가 우당탕탕 한참을 시달리고 나면 어느새 모진 때가 쏙쏙 빠져나가고 본살이 뽀얗게 드러난 후 눈부신 빨래가 되더라니깐
그러고 나서 우리는 빨랫대로 가서 사이좋게 두 팔을 벌리고 사열 종대로 정렬했네 호루라기 소리가 사방에 진동하더구만 그녀는 항시 양지바른 남쪽 베란다에 구겨진 옷깃마다 주름살을 펴서 널었지 때로는 팔이 아프다고 눈이 부신다고 투덜댔지만 때마침 불어오는 실바람에 솔솔 풍기는 세제 향기가 좋다고 다들 중얼거렸지 우리들이 신나게 부르는 삶의 합창은 음정 박자가 잘도 맞았어
그때가 좋은 줄 그때는 정말 몰랐네
-전문(p.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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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시학』 2024 여름(70)호 <이 계절의 시 1> 에서
* 윤고방/ 1978~1982 『현대문학』『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낙타의 모래꽃』『쓰나미의 빛』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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