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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궨당의 세계로(부분)/ 김은정(글·사진)

어서 오세요, 궨당의 세계로      김은정/ 글 · 사진         제주에는 주봉主峯인 한라산을 중심으로 측화산側火山이 가족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한 마을에서 이웃으로, 가족으로 궨당으로 살아온 제주인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던바의 수(Dunbar's number)*로 유명한 인류학자 던바(Robin Dunbar)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최대 150명이라고 주장했다. 절친한 관계는 3~5명, 공감할 수 있는 사이는 15명, 이렇게 인연의 깊이와 관계를 확장해 나갈 때 그 최대치가 150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의든 타의든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완벽히 타인과 차단된 채 살아가는 삶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더구나 내 고향 제주에서는 더 요..

한 줄 노트 2024.07.12

김두한_석정호의 시 세계(발췌)/ 우박 : 석정호

우박     석정호    요양 병원에 엄마를 모셔놓고  오지도 않는 형들과 전화통 속에서  싸우고 돌아가는 길  느닷없이 우박이었다  복숭아나무 옆을 지나고 있었다  후려친 말들이 깊게 박인  열매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새 누렇게 배어든 진물  '이래가 우애노'*  엄마의 울먹임이 컴컴한 동굴이다  침상과 한 몸으로 붙어버린  눈물의 출구가 되어버린  엄마  '나는 잘 있으니 올 것 없다'  나직이 입을 닫으며  자식들의 뺨따귀를 향해 날리는  엄마의 우박 싸대기였다      -전문-       * 이래서 어떻게 하노   ▶석정호의 시 세계(부분)_김두한/ 시인  석정호는 나의, 고등학교 동기생이다. 그의 본명은 이정호. 학교와 집 사이만 왔다 갔다 하며 공부만 하던 그 시절에 그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

시 숲 외 1편/ 김백겸

시 숲 외 1편     김백겸    몽상 소년은 가죽나무와 오동나무가 있는 울타리에서 평상에 누워 구름을 보며 낮잠이 들던 어린 시절에도 시 나무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바람에 날리는 이파리들이 푸른 침묵을 뒤집어 보여주는 흰 배때기들이 웅얼거리는 아기의 입술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   몽상 소년은 같은 울타리를 사용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정을 메운 플라타너스를 아침노을과 저녁노을 사이로 매일 창밖으로 쳐다보았다  청소년기의 짙은 우울과 몽상은 이파리를 따라 피고 졌으나 시 나무가 플라타너스의 모습으로 안개 속에서 희미한 검은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음을 그때도 몰랐다   몽상 청년의 심장으로 피가 몰리기 시작하고 가슴에 웅덩이로 패인 검은 상처가 시간을 빨아들였으며 현실로 향한 마라톤 경주의 출발..

커피와 사약/ 김백겸

커피와 사약     김백겸    커피 중독이 세종시 나성동 어반 아뜨리움 상가들이 라스베가스 스트리트 물처럼 올라간 산책길의 마지막에 이르러  커피 중독이 상가의 윈도우에 황혼이 비쳐 있는 투섬플레이스로 갈까 이디야로 갈까 망설이는 끝에 이르러  커피 중독이 이디야 커피숖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키고 창가에 앉은 방황의 끝에 이르러   커피숍 창밖에는 휙 바람이 불어 가로수 이파리가 '너 자신을 알라'는 아폴론 신전의 경구처럼 흔들리고 있는 끝에 이르러  커피 중독이 대학 첫 미팅 때 너무 떨려 커피잔을 잡을 수가 없었다던 친구의 청춘과 노회한 시골 의사로 늙은 일생을 뜬금없이 대비하고 있는 생각의 끝에 이르러   커피 중독이 둥근 알람 판에 불이 들어와 기다림의 보상을 받는 만족에 이르러  스님도 커피..

한성례_전통 서정을 구축한 디아스포라의 재일시인/ 무사시노 : 안준휘

무사시노武蔵野     안준휘安俊暉 / 한성례 譯    무사시노에  뽕나무 오디열매가 익어갈 무렵  그대와   만났네   무사시노의  졸참나무 단풍  잎 하나는  그대와 나의  정표   자욱한 비안개  속  인생의 시간  쉬지 않고  지나가네   내가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무사시노에 있었네   그 무렵  직박구리만  울고 있었네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신에게 갚는 것  나 자신의  죄를 갚는 것  무의 사랑에  눈 떠  가는 것   그대  나를  이국적이라  하네  내 안에  아버지 살아 계시고  어머니 불 밝히시네  내 고향  부모님 고향  갈댓잎  바람개비 돌고 있네   내 고향  산철쭉  보니  아버지 고향  경주의  산철쭉 생각나네   지금 내 무덤 위  솔바람 울고  멧새 지저..

외국시 2024.07.11

김태경_인권운동의 발상지 진주와 타자 연대성(발췌)/ 수박 : 허수경

수박     허수경(1964-2018, 54세)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5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5      정숙자    한 자도 쓰지 못한 편지를 부칩니다. 더는 희망할 것 없어져 버린 저의 이상은 침묵밖에 남은 것이 없기에 꿈이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ᄀᆞ능성을 잃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는데…. 초토화된 기슭의 현장에서 저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잃어버렸어요. 저에 의한 꿈이 아니ᄅᆞ 꿈에 의한 저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1990. 10. 25.)                  '부처님 오신 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양가 부모님과 지아비를 위해  스승님과 돌아간 오라버니를 위해   자식들과 자신을 위해서도 연등을 달고나서는,   극락전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대웅전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매해 그래왔듯이 이웃을 위해서도 한 번 더 절했습니다   올해는 난생처음 나라..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5/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5      정숙자    한 자도 쓰지 못한 편지를 부칩니다. 더는 희망할 것 없어져 버린 저의 이상은 침묵밖에 남은 것이 없기에 꿈이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ᄀᆞ능성을 잃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는데…. 초토화된 기슭의 현장에서 저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잃어버렸어요. 저에 의한 꿈이 아니ᄅᆞ 꿈에 의한 저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1990. 10. 25.)                  '부처님 오신 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양가 부모님과 지아비를 위해   스승님과 돌아간 오라버니를 위해   자식들과 자신을 위해서도 연등을 달고나서는,   극락전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대웅전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매해 그래왔듯이 이웃을 위해서도 한 번 더 절했습니다   올해는 난생처음 나..

나를 찾아서 외 1편/ 김육수

나를 찾아서 외 1편      김육수    왕산골행 941번 첫차가 오면,  옷 위에 올라앉은 어둠과 오른다  차창에 새겨진 무표정한 얼굴  낯설어 보이지만 어젯밤 죽었던 내 얼굴   고개 숙인 논길을 지나  조팝나무 안내 따라  한적한 왕산골에 배송되는,  밤새 강한 척하다 죽었던 나는  어둠 뚫고  먼저 온 햇살을 포옹한다   대나무 샛길로 가다가  숲 사이로 잠기는 늪  그 늪에 빠져 지난날 죽었던 내가  수많은 나를 바라본다   햇살을 포옹하며 묻혀 있다가  어둠의 단추를 풀고 다시,  다가올 나를 찾아가는 시간들     -전문(p.12)        --------------------------------      수산시장 회 센터    밀려온 바다에 발목 잡힌다  대야에 산소호흡기 달려 있다..

저녁이라는 말들/ 김육수

저녁이라는 말들     김육수    숲속에 걸친 빛들은 물러가고  어둠이 채워지는 산길로  저녁이라는 말들이 길게 드리운다   산모퉁이에 자그마한 집 굴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환했던 낮과 저녁 사이에 태어난 말들,  그 수련한 말들은 허공의 빈 의자를 찾아간다   산 그림자가 지워진 저녁 하늘  풀벌레 울음소리가  오두막에 쉬고 있는  한낮의 말들을 지우고  저녁이라는 말들이 울고 있다   어깨를 다독이는 달빛을 품고  소로小路로 가는 상처 난 영혼들  걷는 발걸음 소리조차 부담스러워  바람길 따라 침묵 속에 간다   아직은 밤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물렁물렁한 저녁의 말들이  허공의 빈 의자를 채우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김육수의 첫 시집 시편들을 독서하면서 느끼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