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기형도
내 영혼靈魂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 앓는 그대 정원庭園에서
그대의
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전문(p. 231)
※ 『기형도 전집』, 새로 찾아낸 미발표 시(1999, 문학과지성사,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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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김상미
모든 꽃은
피어날 땐 신을 닮고
지려 할 땐 인간을 닮는다
그 떄문에
꽃이 필 땐 황홀하고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
-전문(p. 231)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2022, 문학동네, p-15)
▶꽃, 몰라서 아름다운 나의 신부여(부분)_김남호/ 시인 · 문학평론가
꽃은 오랫동안 우리 삶을 수식해온 상징기호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 과정에 걸쳐 꽃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여한다. '삶은 곧 꽃이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생일 때도, 입학과 졸업 때도, 결혼과 출산 때도, 입사/ 승진/ 퇴사 때도 모두 꽃이 있다. 이사를 가도,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해도, 마침내 죽어서도 꽃이다. 경조사는 물론 사랑과 존경, 감동과 화해 등 꽃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가 없다. (p. 225)
누가 뭐래도 꽃은 사랑의 이미지이다. 이때의 꽃이 장미꽃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그대 때문에 "영혼靈魂이 타오르"고 그대는 나 때문에 "가슴앓"는다. 나는 그대를 위해 밤새 그대의 정원에 '뜨거운 꽃'으로 서 있고 싶은 것. 내가 꺾여 그대 머리맡에 꽂힐 수 있다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겠다. 내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기울 수 있다면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고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사랑이란 대상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욕망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 사람을 위로하고 위무하며 안식하게 할 수 있는 사물이 꽃 말고 무엇이 또 있을까.
꽃은 피어 있는 상태로도 좋지만, 피거나 지는 순간에 느낌이 더욱 강렬하다. 필 때와 질 때의 차이를 "피어날 땐 신을 닮고/ 지려할 땐 인간을 닮는다// 그 때문에/ 꽃이 필 땐 황홀하고/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고 명쾌하게 정리한 시인도 있다. 그런데 '시의 자리'는 신의 위치가 아니라 인간의 위치여서 필 때보다 질 때에 더 강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형기, 「낙화」). 이 구절 하나로 우리는 이미 오래전 '지는 꽃'을 통한 이별의 미학을 강렬하게 학습한 바 있다. (p. 23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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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층』 2024-여름(102)호 <사물로 읽는 詩 - ② 꽃> 에서
* 김남호/ 2002년『현대시문학』으로 평론 부문 & 2005년 『시작』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말하자면 길지만』외, 평론집『깊고 푸른 고백』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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