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자유, '보는 것'에 대한 시적 탐색(발췌)
최하림의 시와 삶
'산문시대'와 문청 시절
최하림 시인의 문학 여정은 멀리 그의 대학 시절, 그러니까 1960년대 초반의 '산문시대' 동인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문단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신선한 세대론적 신진대사를 이루었던 '산문시대', 그는 김현과 함께 그 산파역을 맡는다.
"1961년 겨울이었나 봅니다. 그 시기는 제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어요. 그중 하나는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를 알았다는 거예요. 그때 한국 시단에서 발레리를 알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비약이랄까, 아무튼 전대미문의 새로운 지평이었어요. 전혀 새로은 대륙을 발견한 것 같았지요. 물론 우리에게는 어려운 시였지만, 빛나는 광휘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저는 박이문 씨 번역의 『발레리 시집』을 끼고 다니면서 그 안에 매료되었는데, 특히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첫 구절 같은 것은 객관적 거리를 가지고 탐색해볼 겨를도 없이 흠뻑 빠져들어간 기억이 선명합니다. 또 목포 헌책방에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저는 그 세계에도 취했어요. 발레리나 릴케, 베케트 이런 사람들이 제 문청文靑 시절의 자양분 노릇을 한 겁니다. 그리고 그 시기가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예술가들이 즐겨 모여들었던 목포 오거리 3층 다방에서 평론가 김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겨울방학쯤인가 김현이 저에게 '산문시대'를 같이하자는 제의를 했어요. 나중에 김치수, 김승옥 등이 참여하게 된 그 동인지는 당시 가림출판사 김종배 사장님의 후의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그 시대 사회는 물론이고 전체 문단에도 그야말로 신선하기 짝이 없는 충격을 주었어요. 전쟁 치르고 10여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니까 이제 우리도 문학의 현대적 갱신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저희가 한 걸음 앞서서 주창했다고 봐야지요. 물론 거기에는 4·19세대라는 정치적 후광도 있었습니다. 4·19가 우리에게 선사한 자유스러움이 그와 같은 행위와 정서를 가능케 한 거지요.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라는 것을 개념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더불어 최하림 시인은 김수영이라는 커다란 시적 산맥과 조우한다. 김수영은 해방 직후부터 우리 시단에서 독특한 현실 인식과 어법으로 당대를 풍미한 시인이었는데, 김수영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최하림은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그 결과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 『자유인의 초상』(문학 세계사, 1981)이라는 김수영 평전이다. (p.12~13)
최하림(1939-2012,71세)은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읜다. 그는 바다를 면한 마을에서 굶주림과 어머니와 전쟁과 바다를 시의 원체험으로 삼으며 자랐다. 그의 시에 배어 있는 비극적 현실 인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장하지 않고 내면으로 수용하여 반성적 사유로 이끄는 도덕적 열정은 역설적으로 말해 신산했던 그의 생애가 키워 올린 자질이다. 또한 그는 어떤 문학적 그룹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그룹 논리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그 그룹 내의 자리를 내내 찾았고 그룹 논리에 반대되거나 독자적 논리를 찾으려 애썼다. 그의 그 같은 행동과 기질은 김현의 "시는 외침이 아니라 외침이 터져 나오는 자리"라는 말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p.15)
'광주' 체험의 의미
최하림 시인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의식의 전기를 이룬 것은 1980년 5월 저 뜨거웠던 '광주'의 체험이다. 그 경험은 1980년대가 끝나가는 즈음 다음과 같은 절창絶唱을 낳는다.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
눈이 나를 보고 있다
이 도시의 집들이
나무들이
창들이
굴뚝들이
새벽마다
쓸려가는
이 도시의
쓰레기와 병들과
계급과 꽃
데모와
바람과
바람의 외침들이
보이지 않는 내 손짓
보이지 않는 내 눈짓
보이지 않는 내 소리짓
을 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내 맘속의 맘까지도
저 배반과 음모까지도 보고 있다
이 도시의 눈들이 내 모든 것을 보고 있다
오오 나를 감시하는 눈들이 보는 저 꽃!
하늘의 상석에 올려진, 아직도
피비린내 나는,
눈부시고 눈부신 꽃
살가죽이 터지고
창자가 기어나오고
신음 소리도 죽은
자정과도 같은,
침묵의 검은 줄기가
가슴을 휩쓸면서
발끝에서 심장으로
오오 정수리로······
- 전문,「죽은 자들이여, 너희는 어디 있는가」
이 시를 두고 그의 지기知己 김현이 "침묵으로 외침으로 오히려 풍요로워지는" '광주'를 노래한 시의 백미白眉로 읽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이 시는 증언적 성격이 강했던 당시 리얼리즘 계열의 시와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시인은 미증유의 부도덕한 폭력 앞에서도 자신의 내부에 있는 배반과 음모를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결한 영혼의 시인이 아니고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만큼 '광주'의 폭력은 그에게 역사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자기 내면으로의 강한 회귀를 가져온다.
5월 광주의 상흔은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문학과지성사, 1991)에 곡진하게 담겨 있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외적 폭력의 혹독함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의식의 형상이 결합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시편들은 광주를 고발하거나 그것을 이념으로 해석하는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것 또한 그의 내면의 심연으로 들어와 있다. 결국 최하림은 시를 의사 전달의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실존적 욕구와 그 간절함이 표현되는 자리에서 시가 생성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가 김수영의 역작 「풀」을 이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자신의 본질 속에 운동성을 내포한 존재로 읽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제 시는 최하림에게 실존의 다른 이름이며, 그에게 이른바 치유(therapy) 효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에게 시밖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p. 17~18)
[ 『소금과 빛』, 199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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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하림연구회 엮음 『최하림 다시 읽기』 2021. 9. 6. <문학과지성사>펴냄
*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학교 국문과 교수, 지은 책 『침묵의 파문』『움직이는 기억의 풍경들』『다현 김현승 시 연구』『서정의 건축술』『단정한 기억』『근대의 심층과 한국 시의 미학』등 (p.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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