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전쟁문학의 기수旗手, 문덕수 시인을 뵙다
-문덕수(文德守, 경남 함안 출생, 1928-2020, 92세)
김예태/ 시인
김예태_ 제가 많이 빈천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선생님의 시세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문덕수_ (시간을 거슬러 오르시는지 환한 빛줄기가 앞장을 선다) 나는 1950년 초봄 처음으로 정지용과 청마를 만났어. 이 해에 6 · 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나는 군에 들어가게 되고 격전지 철의 삼각지대에서 부상부상負傷하여 오랫동안 육군병원 신세를 지고도 차도가 온전치 못한 채, 제대한(1953) 후부터 시를 쓰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지용과 청마를 만난 것은 시의 '형식'과 '역사'의 만남이었던 것 같네.
김예태_ 선생님께서 시쓰기의 출발지점을 '청마의 역사의식과 지용의 모더니즘에 두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청마의 역사의식은 시의 정신(의식)이요, 지용의 모더니즘은 시정신을 담아내는 시쓰기의 방법(형식)이었네요.
문덕수_ 그렇지. "나의 시쓰기의 반세기는 형식주의와 역사주의의 두가닥 길이 엇감겨 꼬인, 좀 험한 길"이었지. "형식과 역사의 팽팽한 줄 위에서 내가 춤을 준 피에로였다고 하더라도 후회는 없어. 그 무렵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허물고 역사주의를 많이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형식주의 즉 모더니즘을 버리지는 않았지. 나의 모더니즘은 역사주의를 받아들인 것이야."
김예태_ 그런데도 선생님을 김춘수와 더불어 1960년대를 대표하는 무의미의 시인, 모더니스트라고 해왔잖아요.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였어요. '시인은 마음놓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고 평론가는 뒤를 따라 가며 부지런히 그 길을 정리해주는 사람'이라고요. 시인의 방법론적 개척정신을 담아내신 이 교과서는 선생님께서 집필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이 방법론에도 역사의식은 내재되어 있었다는 말씀이지요?
문덕수_ (오래도록 천천히 끄덕이신다. '시 의식을 배제하고 형식만 보는 것은 외눈박이들의 시 읽기'라는 말씀으로 들여온다.)
김예태_ 선생님의 첫 시집 『황홀』(1956)에서는 전쟁의 이미지가 선명했어요. 훌륭하다는 시단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보다 높은 수준의 미의식을 추구하셨어요. 그래서 10년씩이나 걸린 칸딘스키의 추상주의에 입각한 제2시집 『선 · 공간』(1966)에서는 전쟁이 보이지 않을 만큼 추상화된 도형 이미지들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었어요.
문덕수_ 맞아. 『황홀』을 쓰고 난 뒤에 생각했지. 전재의 외상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진정한 전쟁문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김예태_ 그렇게 시 쓰기의 방법론에 대해 끊임없이 추구하셨기 때문에 선생님의 시를 모더니즘의 일방향만으로 보는 오해가 생긴 것이 아닐까요.
문덕수_ 혹시 이런 구절을 읽어 본 적이 있나? "참전(6 · 25 한국전쟁)으로 겪은 죽음과 폐허의 체험에서 현실에 절망하고 눈을 내면으로 돌린 필자의 시 쓰기 동기에 대해 스스로의 성찰과 의미부여도, 약 40년이 지난 1990년대에 와서의 일이요, 더구나 시 쓰기의 출발지점인 사물인식의 기본 태도, 즉 시 쓰기의 스타트라인을 모르고 시작했다는 사실을 노년의 막바지에 와서야 깨달은 만시지탄은 우리 모두에게도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예태_ 예! 이 부분은 제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문덕수! 도대체 이분은 어떤 분이실까? 한평생 시를 쓰고 문단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분께서 노년에 만시지탄을 후학들에게 타산지석으로 삼으라고 내놓으시다니···. 그날 밤 선생님 시집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시로 인한 고통과 고독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선생님을 존경하게 된 이유가 바로 만시지탄을 토로하신 이 말씀 때문이었어요. 당신을 온전히 시에게 바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고백이라고 생각하면서 대체 이 분이 얻고자 하는 시의 실재實在는 어떤 것일까 궁금했거든요.
문덕수_ (가만히 바라보시다가) 혹시 자네 내가 만시지탄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가?
김예태_ 아니지요! 선생님께선 『우체부』에서 전쟁문학을 완성시키지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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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2022-3월(637)호 <가상 인터뷰> 中/ p. 236-238.
* 김예태/ 2011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빈집구경』『예술은 좋겠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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