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_대담(발췌)>
모래
금보성
내 아비
사원 같은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종 같이 평생 주문 외듯
골골거리는 파도와 살았다.
꼿꼿한 나머지
발목의 아킬레스를 끊어
종놈으로 살아주기를
눈치 채고 난 아비를 떠났다.
아비가 가보지 못한 세상으로
달아날수록
서걱이는 것이 있다.
신발을 털어내고 옷을 다 버렸어도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소화하지 못한
불꽃이 태우지 못한
아비의 사리들이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하염없이 쓸려
들어왔다 나갔다, 하고
있었던 거다.
파도처럼
-전문, (p. 142-143)
▶시와 회화와 영성의 세계-금보성 시인을 찾아서(발췌)_이재훈/ 시인
Q.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문학의 원체험으로서 기독교는 금보성 시인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저희는 3대가 이어진 기독교 가정입니다. 할아버님이 100년 전 교회를 개척한 장로님으로 교편을 잡으셨는데 당대 지식인이었죠. 어려서 문학에 매료되어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기독교 집안에서는 잡기라고 생각했어요. 목회자 길을 가려면 다른 것에 관심 가지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으면 달란트고요. 신학을 하는 사람이 그걸 가지고 있으면 쓸데없는 잡기들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를 쓴다는 것을 드러내면 너는 신앙이 아직 멀었어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한테는 그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던 것이죠. 예술도 귀한 달란트인데 저는 들키지 않고 숨기면서 활동해야 했습니다." (p. 141-142)
신께서 주신 귀한 달란트를 숨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감정이 비슷한 처지를 경험한 나로서는 큰 공감을 얻었다. 신과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평생이 걸린다.
위 시에서 아비는 육신의 아버지로 비춰진다. 세상은 파도처럼 늘 부침이 많아 누구나 신산한 삶을 살게 마련이다. 아버지라는 상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예술가적 천성을 타고난 시인의 길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아버지를 떠났지만 시인은 늘 아버지가 태우지 못한 사리들이 내면에서 서걱이는 모래로 남아 있음을 고백한다. 모래라는 소재를 통해 시인의 삶을 떠남과 회귀의 서사를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래를 이렇게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은 금보성 시인이 겪었던 영혼의 회귀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보성 시인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하지만 늘 이름을 바꾸어 시를 발표했다. 등단한 곳만 대여섯 군데가 되었다. 문단이라는 곳을 모르고, 오직 이름을 바꾸어 쓰고 어딘가에 발표하던 시절이었다. 시집도 그렇게 해서 출간했다. 현재는 찾아볼 수 없는 시집도 많이 있다. 그렇게까지 해서 시를 써야 했을까. (p. 143)
Q. 신학과 예술의 갈등이 작품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예술적인 끼가 가려지지는 않잖아요? 계속 날마다 시를 써야 되고 날마다 그림을 그려야 되는데 이걸 어떻게 가릴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몰래 하는 거예요. 이름을 바꾸어서 하는 거죠. 전시를 하더라도 이름을 바꾸고, 시집을 내도 이름을 바꾸고요. 36년 그림을 그렸는데 25년간 이름을 바꾸며 전시를 하였습니다.
당시 천착했던 주제는 한글을 모티프로 삼은 것인데요. 당시에는 제가 목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이 알려지면 안 좋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1985년 때부터 시 쓰는 동인들 모임에 참석했는데요. 거의 흥청망청 술자리였어요. 교회에서는 제가 술 먹지 말라, 그런 거하면 안 된다, 고 가르치면서 동인들 모임에 매일 술자리 참석이어서 힘들었습니다. 사실은 너무 두려운 거죠.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있는 현실을 자꾸만 가려야 되는 거예요. 이름을 바꿀 수밖에 없었죠." (p.14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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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1-7월(379)호 <커버스토리_금보성>에서
* 금보성/ 화가, 1998년『현대시』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일곱 권의 시집을 펴낸 바 있음
* 이재훈/ 시인,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명왕성 되다』『벌레신화』, 저서『현대시와 허무의식』『딜레마의 시학』『부재의 수사학』, 대담집『나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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