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2010년 9-10월호 <테마인터뷰> | 정숙자 시인 : 임현숙 기자
숲은 나에게
맑고 따뜻한 고향입니다
Interviewee : 정숙자/시인 Interviewer : 임현숙(글)/객원기자 · 편집위원
시월 숲길
정숙자
흔들지 않아도 떨어지는
시월 숲길은,
석양은, 새로 칠한 단청빛이다
감자 싹같이 포근한 편지
북으로, 남으로도
날려 보내자
금홍이의 동전
여막밭 새소리도
이 무렵 바람에선 음이 깊었다
싸리꽃 냄새, 탱자나무 길
돌계단 몇 개 날아내리면
고구마순 한 무데기 먹던 우리집
뿔이라곤 모르고 늙었던 황소
흔들지 않아도 떨어지는
시월 숲길은,
추억은, 제자리서 꼭꼭 여문 풀씨들이다
-전문, 『정읍사의 달밤처럼』(한국문연.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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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가끔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린다. 하늘은 짙은 색을 띠며 높아지고 나뭇잎들은 초록이 옅어지며 알록달록 물들 준비를 하고 있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정숙자(59) 시인을 만났다. 단아한 모습에 맑은 눈빛을 지닌 그녀는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가을을 닮은 시인이었다.
정 시인의 집은 서울 반포지구다. 만나자마자 날마다 걷는 산책로가 있다며 우리들을 안내했다. 한강으로 흐르는 냇가를 옆에 낀 산책로. 서울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할 만큼 녹음에 둘러싸여 있었다. 매미 울음소리와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는 그 분위기를 더해준다.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지만 김제가 고향이라는 그. 꽃이나 풀에 맺힌 이슬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것만큼 큰 행운이 없다고 말한다.
정 시인의 시에는 김제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이 녹아있으며, 비록 도시 속의 녹음이지만 그 안에서 여전히 숲과 자연에 대한 감성을 동경하며 지켜가고 있었다. 자연감성이 충만한 그에게서 문학과 숲, 그리고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숲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A 나에게 숲이란 늘 ‘맑고 따뜻한’ 고향입니다. 어렸을 때 살던 마을 뒤쪽에 자그마한 ‘숲’이 있었어요. 온통 농토뿐인 김제벌의 한 퀼트에서 그 숲만은 곡식이나 채소를 심지 않았습니다. 혼자서는 무서워서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희고 노란 꽃가지와 익어가는 보리밥, 까치밥들, 또 장마가 걷히는 무렵 버섯냄새와 풀벌레소리가 한데 어울렸던 우아한 정취가 있었어요. 어린 나이에도 그 정취가 사뭇 좋았습니다.
Q 문인들은 자연이나 숲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내는데요. 문인들에게 숲은 어떤 존재일까요? 선생님께서 작품 활동을 하실 때에도 숲에서 영감을 얻으시는지요?
A 문인들에게 숲은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영감의 보고寶庫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딱히 숲이라고 한정하기 보다는 식물의 삶이 매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식물과 인간은 생태가 비슷하고 또 호흡을 주고받는 상호협조관계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삶을 성찰하다보면 식물과의 접점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벼들이 바람에 파르르 흔들리는 모습도 예쁘지만 맺혀 있던 이슬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 위로 태양이 뜨면 하나하나 반짝반짝 빛나면서 정말 아름답지요. 그리고 잎에 스며들어 성장을 도우면서도 이슬은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아요. 이렇게 보고 겪었던 것들이 성찰을 통해 작품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Q 숲이 주는 자연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일부러 산에 간다든지, 자연을 찾으시는 적도 있으신가요? 자주 찾는 장소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일부러 찾으러 간 적은 없어요. 매일 찾는 산책로가 있습니다. 한강변까지 어어지는 산책로인데, 거의 매일 2시간 정도 걸어요. 제 눈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숲이기도, 산이기도 합니다. 또한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자연’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Q 작품 증에 산과 관련된 작품이 다양한데, 가장 마음에 있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리고 그 작품이 탄생한 배경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A <산은 넘는 자의 것이다>라는 작품인데요. 이 시 속의 ‘산’이란 지표면에 불쑥 솟아오른 흙더미이기보다 고통이 담보된 난관의 관념화입니다. 우리의 할머님들께서도 과거지사를 들려주실 때면 “산 넘고 물 건너 왔느니라.” 하시지 않던가요? 그런 표현을 들으면 시인만이 시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이미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다가 길이 막히면 거기서부터가 산이다
산을 넘지 못하면 그 너머 길을 잇지 못한다
평지에 허리를 감춘 산은 압구정동 네거리 거실 의자 중환자실 침대 위에도 있다
산을 허무는 일이야 산을 일으킨 바람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혼자다
갈수록 비탈일 수밖에 없다
많은 이가 한 길을 함께 걸어도 그 길은 제가끔 다른 길이다
관점이 길을 바꾼다
지상에 난 모든 길은 관점으로 가는 길이다
산을 오래 타다보면 사람도 산이 되는지 얼굴 어딘가 폭포가 숨고 이끼가 끼고 나비가 되지 않는 벌레도 안고 키운다
전생을 건너온 발이 여기 발아된 그 순간부터 산은 매복하고 있었던 게다
많기도 하지
어디든 눈을 던지면 산이 산을 업고 또 기대고 있다
어둠이 다락 같은 저 붉은 산들을 누가 다 넘어갔을까
-정숙자, 「산은 넘는 자의 것이다」(전문), 『열매보다 강한 잎』(천년의시작. 2006.)
Q 가을은 문인의 계절인 듯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계절을 좋아하시고, 또 어떤 때가 되면 작품 창작이 더 왕성해지는지요?
A 어느 계절인들 문학과 뗄 수 없겠지요. 제가 태어난 계절이라서 그런지 가을은 유독 애틋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찬 공기의 쓸쓸함이 사색의 문을 좀 더 열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에게 가을은 저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가을이 깊어질 때마다 지나온 삶을 달아보곤 합니다. 해마다 그걸 되풀이하면 허虛와 실實이 잘 느껴져요.
Q 앞으로 어떤 작품 활동을 하고 싶으신지요?
A 자타의 삶에 위안이 될 수 있는 ‘맑고 따뜻한’ 작품을 쓰고 싶어요. 그 실천을 위해서는 진지, 진실, 그리고 유쾌함을 잃어서는 안 되겠지요. 살아 있는 한 종이 한 장, 물 한 그릇, 나무 한 그루를 홀대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그의 시집과 수필집을 선물로 받았다. 시집과 수필집을 넣은 봉투는 닳고 닳아 오래된 봉투였는데,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다. ‘손질 2010.7.3./ 헌 종이에 생명을’ 정 시인은 모든 것을 소중히 바라보고 귀하게 여길 줄 안다. 하얗게 세어버린 백발도 그에겐 자연스럽다. 어느 날 염색을 하다보니 염색약이 너무 많이 빠지는 것을 보고 물이 오염될까봐 염색을 안 한다고 한다. 자연에 대한 사랑을 글로 표현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 시인은 말한다. “내 인생의 캐치프레이즈는 ‘맑고 따뜻하게’입니다.” 그래서 인터뷰하는 내내 맑고 따뜻한 향이 났나보다. 그와 함께 하는 동안 고향에 다녀온 듯 마음이 푸근해졌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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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산지보전협회 사외보 격월간 『산사랑』 2010년 9-10월(통권 29)호 <테마 인터뷰>전문
* 기획 및 편집/ 손소희
* 글: 임현숙 객원기자/ 편집위원
* 사진: 편집실 ( ※ 사진, 싣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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