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장만호
쉰은 내가, 모르는 나이
죽은 나의 아버지는 더더욱 몰랐던 나이
모르는 걸 알아가는 나이
그러나 천 명은커녕
나 한 명도 모르겠어서
우물쭈물하는 나이
잘 살고 있지?
난, 짤렸어,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살면서
보험 하나쯤은…
오랜만에 전화해서는 친구들의 부고와 사고를 전해주고는
열 가지 암쯤은 가볍게 보장한다는,
아직은 서툰 이 초짜도 쉰인데
쉰은 쉬어가는 나이
왜 쉬는지, 어떻게 쉬는지
모르면서, 잊으면서
잊혀지면서,
강의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킁킁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며
내 몸 냄새를 맡게 된다
오래도록,
벤치에 앉아
나무에서 흘러내린 저녁이 송진처럼 굳어질 때까지
호박빛 노을에 갇혀 있다
보면, 쉰은 무언가
아름다운 유폐 같다가도
주공아파트 홍단품, 청단풍나무들
산통에서 뽑아낸 산가지처럼
제 손금을 비춰보는 가로등 불빛, 너머의
하늘
사라지기 위해 전진하는 구름의 배밀이처럼
나의 생이, 모르는 곳으로 흩어지고 있다
-전문-
▶ 유폐의 시학(발췌)_ 전철희
공자는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知天命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보다 수명이 훨씬 늘어난 오늘날의 상황에서 오십이 되면 하늘의 뜻까지 헤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50 정도의 나이가 되면 삶을 스스로 돌아보고 성숙한 사유를 통해 가족을 부양하면서 안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가 아예 사라지진 않았다. 이 시의 화자는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렵다고 말한다. 쉰 살이 되어도 천명(1,000명)은 커녕 "나 한 명"도 잘 모르겠다는 재치 있는 언명을 통해서 말이다./ 다른 한편 50살 정도가 되면, 지금껏 해온 일을 슬슬 정리하고 여유를 가질 때라는 사회적 기대도 있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그런 기대에 대해서도 불편함을 토로한다. 그에게 50살이라는 나이는 "왜 쉬는지, 어떻게 쉬는지/ 모르면서, 잊으면서/ 잊혀지면서" 살아야 하는 나이이고, 그래서 어쩔지 모르고 "우물쭈물하는 나이"일 뿐이다./ 이 작품은 어느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쉰 살이면 "지천명"이 되고 슬기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사회적 관념은 분명히 실재하고 있다. 또한 그런 관명의 틀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지만 도저히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쉰 살 즈음의 사람들도 분명히 이 세상에는 적지 않게 존재할 것이다. 장만호의 시는 "그런 사회적 관념과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p.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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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아돌하』2019-가을호 <신작소시집/ 작품론> 에서
* 장만호/ 전북 무주 출생, 2001년 《세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무서운 속도』, 저서『한국시와 시인의 선택』
* 전철희/ 전남 광주 출생, 2010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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