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야생/ 이현호

검지 정숙자 2019. 10. 2. 17:22

 

    야생

 

    이현호

 

 

  꿈에서도 울었다

  꿈을 깼을 때는 배가 너무 고파서

  눈물로 밥을 지을 수도 있었다

 

  슬픔은 인간의 집에 내려오는 멧돼지 같은 것

  그 어금니로 헤쳐 놓은 감자밭처럼

  모조리 뽑고 부러뜨린 옥수수 대처럼

  쑥대밭으로 폐허로 만드는 것

 

  용기를 갖자 밥도 잘 챙겨 먹고

  짓뭉개진 밭에서 몇 알의 성한 감자를 고르며

  쓰러진 옥수수 대를 일으켜 세우며

  밀알 같은 눈물을 흘리는 우리가 꿈속에 있다

 

  굶주린 멧돼지는 다시 인간의 집을 찾고

  우리를 꿈에서 건져줄 신은

  스스로 만든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억센 털을 바짝 세우고 씩씩거리며

  뒷발을 구르는 멧돼지와 마주쳐서

  피할 생각도 못하고 온몸이 얼어붙어서

  돌진해 오는 슬픔에 갈비뼈가 산산조각 나는

 

  오늘밤도 울면서 꿈을 꾼다

  이런 날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널렸고

  멧돼지도 우리도 언제까지나 배가 고플 것이어서

 

  봐라, 슬픔이 온다 

 

   --------------

  *『시와표현』 2019. 9-10월호 <작시 & 대표시>에서

  * 이현호/ 2007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라이터 좀 빌립시다』『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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