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눈 내리는 체육관/ 조혜은

검지 정숙자 2019. 9. 18. 02:32

 

    눈 내리는 체육관

     - 책장

 

     조혜은

 

 

  언니가 떠나고 먼지 쌓인 책을 읽기 시작했다.

  탁 트인 베란다와 눅눅한 거실 벽을 가득 채우고만 있던,

  냉기 같고 냉소 같던, 냉랭하고 냉담한 표정의 책들.

 

  아이들이 자리를 비우고, 마침내 우리가 서로가 되어 만나던 시간들을

  언니가 모두 버렸다.

  언니는 당당하게 가해자가 되어놓고, 누군가 고의로 담아 놓은 뜨거운 물에 잘못 손을 담근 사람처럼 펑펑 눈물을 흘렸다.

 

  책의 깊은 한숨이 찢긴 마음의 모서리를 채웠다.

  마음이 아파, 마음은 자신을 모두 비웠다.

 

  언니는 서서히 지워져 갔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마음이 되어버린 책들이 집을 비우자, 비어버린 집은 체육관이 되었다.

  남겨진 책장은 땀을 흘렸고

  끝끝내 마음을 버리지 못한 책들은 마음에 남겨져 짠 눈물을 머금었다.

  지워진 문장의 어디쯤에선가

  언니는 가해자의 마음이 되어 나타났다.

 

  왜 그랬어요!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아요.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가해자의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책들이 녹아버린 집은 체육관이 되었다. 언니는 내게 체육관을 가져다주고 사라졌다.

  언니를 버리고 나는 가끔

  남겨진 마음은 다 예뻐.

  우리는 어디로 갈까.

 

  나는 내게 네가 될 수 없었을까.

  작게 불러 보았다.

  언니.

  언니.

  언니.

 

  이런 마지막이라니 너무 슬프잖아요.

 

  오래된 네가 가끔 꿈에 찾아왔다.

  죽을 만큼 크게 다치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삶을 함께하고 싶었는데

  너는 늘 죽음을 들고 찾아왔다.

 

  쓸 때. 나의 숨은 한 걸음에 죽음을 향했다.

  하지만 한 번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더럽혀진 삶은 대답도 없이 되돌아왔다.

 

  나는 한 권의 책이 되어 책장 속에 몸을 맞췄다.

  그 비좁은 한 권의 책이 머물 자리는 체육관처럼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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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사람』 2019-가을호 <신작시> 에서

  * 조혜은/ 2008년『현대시』로 등단, 시집『구두코』『신부 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