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긴 외출/ 주영중

검지 정숙자 2019. 9. 18. 02:42

 

    긴 외출

 

    주영중

 

 

  한 시절이 처형되고

  창밖이 꿈을 꿀 무렵

 

  저기, 폐허 직전의 허공에서 타전이 온다

 

  죽어 있거나 반쯤 죽은 낱말과

  개념과 사랑의 무덤

  조금씩 무너지고 있을 터였다

 

  나는 멀리 KTX를 타고

  책들은

  쌓인 먼지를 털고

  1톤 트럭에 실려

  십 수 년 만에 외출을 한다

 

  낯선 도시를 지나

  와글와글 살아나는 기호들

  초록의 숲과 바람

  신이 났는지 흥에 겨워 수다 삼매경에 빠져드는

  시인 철학자 예술가 정신분석가 허구의 인물 그리고 신들

  덜컹, 엉덩이가 허공으로 들썩이기도 하는

 

  작은 광장,

  움직이는 작은 광장에서

  소월 수영 고흐 명준 프로이트 니체 예수 부처 누혜 프루스트가

  무거운 침묵을 벗고

  약한 고리 강한 고리를 이루며

  낯선 대화를 나누고 있을 터이다

 

  먼 곳에서 무전이 다다르고 있다

  하나의 우주가 깨어지고

  찻잔이 부서지고

 

  다시 조합되는 숲 가운데

  길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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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사람』 2019-가을호 <신작시> 에서

  * 주영중/ 2007년『현대시』로 등단, 시집『결코 안녕인 계절』『생환하라, 음화』